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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숭의전에서 바라보는 가을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9-11 조회수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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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숭의전은 큰 길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다.
연천 지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전방이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울 뿐, 찾기란 어렵지가 않다. 전곡에서 322번 도로를 타고 경순왕릉이 있는 장남면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368번 도로로 나뉘는 길목. 이곳을지나자 마자 임진강을 바라보며 숭의전이 서 있다. 물론 숭의전은 강쪽으로 면해 보이지 않으나 찾아가기 쉽도록 입구에 표식이 있고 약수터도 있다. 길은 잘 포장되어 있으며 문화해설사가 늘 대기한다.
사적 제223호 숭의전이 자리한 곳은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10번지다. 총 6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이 사적지 여러개의 건물중 중심 건물인 숭의전은 넓이가 76.1평에 불과하지만 사실 더욱 넓게 보인다. 중심 건물인 숭의전외에 배신청, 이안청, 전사청, 재실 고직사가 있다.
현재의 숭의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정전(正殿)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이안청(移安廳), 전사청(典祀廳), 앙암제(仰巖齋), 고직사(庫直舍) 등 6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래문(來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제와 전사청은 각각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숭의전은 아미산의 끝자락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으며 푸른 임진강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묘전(廟殿)이다.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와 고려시대 국가에 큰 공헌을 한 16분의 공신(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태조 6년(1397년)에 고려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터에 창건되었고 정종(定宗) 원년(1399년)에는 태조외에 혜종,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의 7왕을 제사 지내게 되었다.
이후 세종 7년(1425년)에 조선의 종묘에는 5실(五室)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태조를 비롯하여 4왕만 모시게 되었다.
조선 제 5대 문종대에 이르러 숭의전이라 이름짓고 4왕과 더불어 고려 16공신에 대한 제향도 지내도록 하였다. 초기 건물은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하여 전소되었고 1972년부터 1973년까지 현재의 규모로 복원 건립되었으며 1971년12월28일에는 국가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숭의전은 임진강안, 단애절벽상, 경승지로서 노수(老樹)가 울창 하여 전각을 싸고 각하(脚下) 일대는 만경창파 회변유수한 별천지이며, 여조(麗朝)의 왕씨 문중들이 완강하게 이씨조선을 거부하였고, 갖가지 설움을 억누르면서 전조(前朝)를 흠모한 충절이 깃들여진 곳이다. 지금도 이곳엔 개성 왕씨 30-40 가구가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숭의전은 활처럼 휘어 도는 임진강 줄기가 노송들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태조가 마시던 어수정은 지금도 이름난 약수터다. 숭의전은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좌선방향이 높으며 바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양은 어딘지 모르게 여주 신륵사와 유사한데 이처럼 바위가 가로막은 것은 바로 임진강의 직충을 방어하는 자연적인 사격이다.
뒤를 돌아가 보니 지각이 발달해 있고 활처럼 휘어진 2개의 지각이 있다.이 2개의 지각중 하나가 발달해 물의 직충을 막고 있고 하나의 지각은 그 힘이 약해서 아미산 끝자락의 숭의전으로 오르는 길에 깎여 나간 모습이다.
전형적인 와혈의 형상이다. 두개의 지각이 좌우를 싸고 있으며 능선 뒤로는 귀성이 지각처럼 발달하였다. 그리고 길 너머에 산들이 있는데 낙산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와혈의 구성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 살펴보면 정전에는 4명의 왕을 봉안하고 있다. 각각 태조(877~943), 현종(992~1031), 문종(1019~1083), 원종(1219~1274)이다. 특히 태조 왕건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의 숭의전이 위치한 곳에는 원래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는데, 이곳에 1397년 (태조 6)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지금의 숭의전의 시초이다. 그런데 고려 왕조를 멸망시킨 조선왕조에서 이곳에 고려왕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무척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배후에는 고려조의 충신들을 아우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이태조가 등극하자 고려 왕조의 종묘사직을 없앨 생각으로 송도에 안치된 고려왕의 위패를 배에 실어 송도 앞에 흐르는 예성강에 실어 띄워 보냈는데 임진강과 합류 지점에 도달한 후 임진강을 역류하여 강원도 철원과의 경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이리 썩은소에서 하루를 정박한 후에 3km 아래에 있는 앙암사 석벽에 머루르게 되었으며 그날 밤 앙암사는 폭우와 천둥벼락으로 순식간 폐허로 변해버렸다.
당시 마전군수는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 이듬해인 태조 6년 앙암사가 있던 자리에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또한 앙암사가 파괴될 당시 경내의 범종이 임진강으로 굴러 물속에 잠겼는데 그 후 국난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소리가 울려 미리 예견했다하여 이 못을 종못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배신청에는 16공신을 봉안하고 잇는데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1) 복지겸 : 고려 개국공신, 시호는 무공
2) 홍 유 : 고려 개국공신, 시호는 충렬
3) 신숭겸 : 고려 개국공신, 시호는 장절
4) 유금필 : 고려 개국공신, 시호는 충절
5) 배현경 : 고려 개국공신, 시호는 무열
6) 서 희 : 고려초기 외교가, 압록강 이남 영토 회복에 큰 공을 세움
7) 강감찬 : 고려초기 명장, 귀주대첩에서 거란족 섬멸
8) 윤 관 : 고려중기의 명신, 여진족 정벌, 시호는 문숙
9) 김부식 : 문신, 학자, 문신의 난 평정, "삼국사기"편찬자
10) 김취려 : 무신, 고종조에 거란족 섬멸, 시호는 위열
11) 조 충 : 문신, 거란족 섬멸, 시호는 문정
12) 김방경 : 무신, 삼별초의 난 평정, 시호는 충렬
13) 안 우 : 무신, 공민왕때 홍건적 섬멸
14) 이방실 : 무신, 공민왕때 홍건적 섬멸
15) 김득배 : 문신, 공민왕때 홍건적 섬멸
16) 정몽주 : 충신, 학자, 고려말 충신이자 성리학자, 동방이학의 시조, 시호는 문충

볼거리로는 숭의전내에 수령이 300-5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20m 둘레가 4.7m이고 이 나무는 조선 문종 2년(1451년)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해오는데,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까마귀가 모여 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현재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숭의전 동쪽에 잠두봉(蠶頭峰)이 있는데 그 형태가 누에의 머리와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즉 와혈의 좌선 방향 지각이 바로 잠두봉인 셈이다.
잠두봉 절벽에는 조선후기 마전군수를 역임했던 한문홍(韓文洪)의 칠언율시가 석각되어 있고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숭의전 입구에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때 개성과 철원을 왕래하면서 그 중간 지점이였던 이곳 앙암사(仰巖寺)에서 쉬면서 마셨던 우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숭의전 서쪽에 도동박이라는 개울이 있는데 조선초 숭의전에서 각종 제기와 귀중품을 훔쳐 달아나던 도둑이 온몸에 땀이 젖도록 밤새 도망했으나, 날이 밝고 보니 멀리 못가고 이곳에서 맴돌고 있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도둑을 잡고 장물을 모두 되찾은 곳이라 한다.

重作 崇義殿
숭의전을 중수하고
麗祖祀宮四百秋
고려 조상을 모시는 제궁을 지은지 4백년이 지났는데
江山豈識興亡恨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요
依舊蠶頭出碧流
오래된 잠두봉은 푸른강물에 의지해 떠 있구나
往世傷心滿月秋
지나간 세월 가을의 둥근달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如今爲郡廟宮修
지금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중수하였네
聖朝更乞麗牲石
열성조는 다시 재물을 갖추어 고려왕들에게 제사토록 했으니
留與澄波萬古流
아마도 징파강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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