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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주 심지원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9-12 조회수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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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심지원 묘 및 신도비는 윤관장군 묘 곡장 뒤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정년월일이 1992년 6월 5일로 최근의 일이다. 광탄면 분수리 산 4-1번지에 자리한 이 묘와 신도비는 청송심씨 대종회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다.
심지원의 묘를 찾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불광동터미널에서에서 좌석버스 32번을 타거나 일반버스 32번 버스를 타고 윤광장군묘 입구에서 하차할 수도 있다. 만약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서울의 북쪽인 벽제까지 가야 한다. 벽제에서 39번 도로를 타고 가다 78번 도로를 타고 계속 달리면 윤관장군의 묘다. 윤관장군 묘역 뒤로 가면 심지원의 묘다.
이 묘는 윤관장군의 묘 곡장 뒤에 자리하고 있다. 윤관장군의 묘와 비교하면 초라하게 보이지만 제법 큰 규모의 이 묘는 조선인조(仁祖)~효종(孝宗) 연간의 문신인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의 묘와 신도비다. 심지원은 조선(朝鮮)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로 감역(監役)을 지낸 설의 아들이다.
심지원은 광해군(光海君) 12년(162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족조(族祖)가 대북파(大北派)였으나 대북의 정책에는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듬해 검열(檢閱)에 등용된 뒤 정언(正言), 교리(校里), 헌납(獻納)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인조8년(1630)에는 함경도 안찰어사(按察御使)로 파견되어 호인(胡人)들과 의 말 무역을 단속하고 육진(六鎭)의 방어대책을 진언해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당시 탄핵으로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가 인조 21년 다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등용되고, 인조 26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때에는 병조, 이조참판(參判)을 거쳐 형조, 이조판서(判書)를 역임하고, 효종 5년(1654)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효종 9년 영의정에 올랐다. 효종 10년에는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효종이 돌아가자 원상(院相)으 로서 국정을 맡았다.
심지원의 묘역은 사적 제323호로 지정돼 있는 윤관(尹瓘)장군 묘와 앞뒤로 인접해 있는데 봉분은 단분으로 전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후 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를 좌우에 안장한 합장묘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상석 전방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좌측아래에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수항(金壽恒)이 글을 짓고 신익상(新翼相)이 글과 전액(篆額)을 써서 숙종(肅宗) 12년(1686)에 건립 하였다.
묘는 어떤가? 묘가 자리한 곳에 부풀어 오른 당판이 보이지 않는다. 즉, 혈의 제일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혹 용맥의 방향이나 물의 흐름을 보고 명당을 가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양택이나 양기에 해당하는 이론이지 음택에 해당하는 이론은 아니다. 즉, 음택의 이론에 양택의 이론을 모두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심지원의 묘는 혈이 결지되었다고 볼 수 없다. 혈이란 혈의 증거인 당판이 있어야 한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지원(沈之源, 1593-1662년)이 죽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묘를 썼다. 그런데 윤관 장군 묘보다는 약간 위에 쓰게 되었다. 명당을 골라 쓴다고 했지만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 위에 씀으로서 결과적으로 과룡지장(過龍之葬)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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