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전통사찰 제202호로 지정된 석림사는 장암동 산 147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지하철 7호선 장암역에서 내려 수락산 계곡으로 약 1킬로미터를 들어가면 계곡 마지막에 나타나는 곳이 바로 석림사다. 일주문을 지나 약 200여미터를 올라가면 좌측으로 새로 만든 부도밭이 보이고 정면에 종루가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 2층으로 지어진 대법당이 있다. 석림사는 서기 1676년 조선현종(朝鮮顯宗) 12년 신해년에 석현 화상(釋賢和尙)과 그의 제자 치흠(致欽)이 석천동(현재 장암동)에 석림암(石林庵)을 창립하였고, 당시 이 암명은 통진현감(通津縣監)을 지낸바 있는 서계 박세당 선생(西溪朴世堂先生)께서 지었으며 이는 현존하는 문집인「서계집(西溪集)」에 기록되어 있다. 서계 박세당 선생(西溪朴世堂先生)의 서계집(西溪集)에 기록된 석천동(石泉洞)은 석림사 도량의 큰 암반에 "石泉洞"이라 새겨져 약 325년의 긴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그후 서기 1676년 병진년 7월에 화주유담화상(化主裕淡和尙)이 삼소각(三笑閣)을 지었으며, 1698년 숙종 24년 무인년 2월에 대홍수로 인하여 사우(寺宇)가 유실된 것을 조가(朝家)에서 매월당(梅月堂)을 뫼시는 청절사(淸節祠)를 세우고 그 옆에 축원당(祝願堂)으로서 석림암(石林庵)을 복원 중수 하였다. 1745년 영조 21년 을축 7월에 역시 홍수로 유실된 것을 익명의 스님이 복원하고 석림사라 개칭하여 내려오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퇴락된 것을 1960년 상인비구니(相仁比丘尼)가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림사 첫 번째 큰 건물인 큰법당의 좌측에 있는 조금 작은 건물, 조금 너저분해 보이는 건물들은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는다. 즉 작은 계곡 앞에 지어진 것으로 뒤를 보면 물이 흐른 흔적이 보인다. 계곡 앞에 집을 짖는 것은 화살 앞에 나서는 것과 같아 계곡 앞에 지은 집은 설혹 당우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막을 수 없다. 큰법당은 시멘트로 지어져서 전통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뒤로 돌아가 보면 큰법당 뒤로 돌출된 기맥이 보인다. 즉, 큰법당은 기맥 끝자락에 지어진 건물이고 법당에까지 기맥의 영향이 느껴진다. 매우 적절한 배치다. 큰법당을 지나면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석림사의 지장보살은 매우 뛰어난 기맥에 자리하고 있다. 기맥이 끝나는 지점에 지장보살입상이 모셔져 있다. 더 올라가면 진영각을 지나 산령각을 만난다. 칠성각과 산령각은 한 당우에 모셔져 있는데 사실 안을 들여다보면 칠성각과 산령각이 아니라 삼성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부에 모셔진 칠성과 산신 외에도 독성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당우의 뒤로 돌아가 보면 강한 기맥의 증거로 암반의 하부가 노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석림사는 그다지 넓은 터도 아니며 교쇄가 뛰어난 곳도 아니다. 장마철이 되어 물이 불으면 피해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터로 보아서는 수리시설을 잘 하면 그다지 문제가 없을 것이며 기맥을 따라 배치한 당우의 배치는 매우 뛰어난 곳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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