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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설왕설래가 있을 법한 우암 송시열 묘소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09-21 조회수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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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송우암 신도비(宋尤庵神道碑) 및 묘소(墓所)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1에 자리잡고 있는 충북기념물 제10호다. 찾기도 어렵지 않다.
송우암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성리학의 대가로서 노론(老論)의 영수(領袖)였던 송시열이다.원래 묘소는 수원(水原) 무봉산(舞峰山:215m)에 있었으나, 1697년(숙종 23)에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는 1779년(정조 3) 청천리 묘소 아래에 세운 것으로 높이 2.5m이며 신도비각 내에 있으며 비문은 정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괴산군 청천면 사무소가 있는 마을에서 증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방향으로 마을 끝에 다다르면 경찰지서가 나오고 맞은편으로 길이 있으며 멀리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인다. 이 은행나무는 송우암의 신도비 옆에 자라고 있다.
골목길을 들어서면 정면에 주차장과 비각이 나타나고 세월의 무상함을 알리는 은행나무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우암 송시열의 묘가 있는 곳으로 계곡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우암 송시열의 묘가 있다.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며, 호는 우암,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면서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었다. 그러나 곧 사직하였다가 1635년(인조 13)에 효종인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가 1637년에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하였다. 그리고 1649년에 효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장령으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에 올랐다가 곧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는 이듬해에 김자점이 파직되면서 다시 진선에 임명되었는데, 1651년(효종 2)에 그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찬술하면서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은 점이 문제되어 청의 압력으로 다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에도 충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658년(효종 9)에 찬선으로 등용되었다가 이조판서로 승진하여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북벌계획은 효종이 그 이듬해에 죽으면서 결국 중지되고 말았다.
한편 효종이 죽으면서 그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송시열은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관철시키면서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좌참찬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 뒤, 송시열은 1660년(현종 1)에 우찬성, 1668년(현종 9)에 우의정, 1672년(현종 13)에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74년(현종 15)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별세하면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는데,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면서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한 송시열은 실각하였다. 그리고 제1차 예송 논쟁에서 기년설을 채택한 점이 문제되어 이듬해에 덕원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던 송시열은 1680년(숙종 6)에 다시 중추부영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숙종 9)에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가 되었다.
이 무렵, 송시열은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제자인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과 결별한 노론을 이끌어 나갔다. 그 뒤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던 송시열은 1689년(숙종 15)에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이어서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이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리고 1694년(숙종 20)에 갑술옥사(甲戌獄事)를 계기로 신원되었다.
그는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주자학의 대가로서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사단칠정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원래 송우암의 묘는 숙종 15년(1689)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정읍에서 사사된 후 수원 무봉산에 있었으나, 숙종 23년(1697)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로 이장(移葬)하였다고 한다. 주산은 현무정(玄武頂)이 우뚝 솟아서 훌륭하다. 전형적인 금형산인데 그 용유가 마치 목형산을 방불케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본신룡(本身龍)이 혈장(穴場)까지 내려오면서 좌우에 호종하는 용호사(龍虎沙)를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내려왔다. 물론 사두혈이라면 그다지 문제가 없을 것도 같으나 선인(先人)들이 말한 전형적인 천룡무장공웅장(賤龍無帳空雄壯:천한 龍은 장막이 없이 웅장하기만 하다)에 해당한다. 기복과 지현자의 용틀임이 약하니 주산에 비교해 형편없이 약한 용맥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나 분명 노년기 용맥이다. 용이 입수에서 솟구치듯 도두하여 혈을 이룰때는 혈장을 보호해주는 사격이 있어야하나 부실하다. 다행이 외청룡과 외백호가 매우 뛰어나니 다행이다.
기맥이 흘러내려와 현재의 묘역 위에서 두개의 지각이 갈라진다. 이는 두 가지의 경우다. 그 하나는 계곡으로 설기된 형상이니 현재의 묘역을 따지면 향(向)을 개울로 하여 원진수(元辰水)에 해당한다. 설심부에서 “원진당심직출 미가언흉(元辰當心直出 未可言凶)”이라고 했는데 이는 “원진수가 혈장 중심으로 곧게 흘러나가면 흉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대로 적용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과연 그럴까? 자세히 실펴 보면 현재의 묘역을 무시하고 입수를 찾아 살핀다. 현재 묘역 위쪽의 남은 공간이 발호 혈장이다. 그리하면 두개의 지각은 겸혈을 이루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묘역 아래로 내려가 보면 전순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의 묘역은 전순을 펼쳐 잡았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주변 사격을 살피면 대세(大勢)는 매우 훌륭하여 좋다. 조안(朝案) 역시 훌륭하다. 백호(白虎) 쪽에서 달려온 산이 매우 좋다. 특히 뛰어난 곳은 안산(案山)이다. 안산은 천계(天階)라 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 모양으로 매우 좋다. 이와 같은 산은 보기 힘든 것으로 고창 선운사 뒤에 자리한 울산 김씨의 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왜 묘역의 방향을 틀었을까? 이는 지극히 통속적이고 패철에 의지한 바가 크다고 보여진다. 향법(向法)은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일부러 맞춘 것이다. 현재의 향법이라면 수구가 손사파(巽巳破)로 이기론으로 따지면 살인대황천(殺人大黃泉)에 해당한다.
흔히 물형(物形)으로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아무리 보아도 장군대좌형이 아니다.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은 두 개의 험준한 봉우리가 마주 서 있는 형세를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곳은 군사전략상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 평화와 안녕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길지로 여겨졌다. 아무리 보아도 대좌는 고사하고 마주보는 산도 없다.
만약의 경우 장군대좌형이라 해도 어찌 물형(物形)으로 풍수지리를 논할 수 있으랴? 물형은 기맥을 파악하지 못하는 풍수사의 보조수단이다. 일부 주장에 의하면 이곳을 대명당(大明堂)이라고 주장하나 아무리 보아도 어불성설이라. 이같은 주장은 혈판이 어떤 형상과 어떤 기맥을 지녔는지 모르는 사람의 주장 또는 영웅호걸은 의당 명당에 묻혔으리라는 선입감 때문이라는 판단이 든다.
풍수지리에 음택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혈장(穴場)을 논하는 것이다. 주변 사격이 아무리 뛰어나도 혈장이 부실하면 명당이 아니다. 주위의 국세와 사격을 보고 무조건 명당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다. 물형은 형기와 이기에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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