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성암을 찾아나섰는데 복성암은 없었다. 단지 용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용주사를 찾아 나섰다. 태안읍사무소 앞에서 603번 도로를 이용해 원북면 사무소 방향으로 향한다. 태안읍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고개를 넘어 우측으로 태안마애삼존불과 태을암을 알리는 간판을 지나고 약 5킬로미터를 가면 우측으로 팔봉면으로 이어지는 634번 도로를 지나친다. 634번 도로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도로가 나오는데 입구에 용주사를 알리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금굴산 용주사 간판을 따라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가면 오른쪽으로 바다가 나타나고 곧 쓰레기소각장이 나타난다. 쓰레기 소각장을 지나쳐 약 1킬로미터를 가면 좌측으로 산의 능선에서 갈라지는 도로가 나타나고 입구에 금굴산 용주사 간판이 나타난다. 다시 1킬로를 가면 성벽처럼 쌓여진 축대와 바위앞의 당우가 보이는 사찰이 나타난다. 용주사로 이름을 바꾼 복성암은 태안읍 삭선리 6-34에 있는데, 창건 연대(創建年代)는 미상이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고려 말엽 (高麗末葉)에 창건되어 매우 번창 했었다고 한다. 한창 번창했을 때는 절구통이 무려 15개가 사용되었다고 하니, 좀 과장된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이는 단적(端的)으로 절의 규모가 웅대(雄大)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웅대했던 복성암이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오면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인하여 사세(寺勢)가 점점 약화(弱化)되어, 마침내 폐사위기(廢寺危機)에 놓이게 되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50년 6.25동란(動亂)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1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61년에 다시 이곳에 초라한 초가집을 짓고 불사(佛事)를 시작하여 그 명맥을 이었다. 1971년에 지금의 주지(住持)가 대웅전(大雄殿)을 신축(新築)하고 포교(布敎)에 최선을 다하니 사세(寺勢)가 번창하여, 현재 경향 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불도(佛徒)들이 운집(雲集)하고 있다. 현재의 규모를 보면 대웅전과 요사(寮舍) 그리고 산신당(山神堂)으로 이루어졌는데,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측에 관음보살 우측에 대세지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이 불상(佛像)의 배열 실태를 보면 석가삼존(釋迦三尊)의 형식이 아닌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배열 형식이다. 물론 각 사찰의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칙으로는 석가여래(繹迦如來)를 안치하면 협시불(脇侍佛)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배열해 놓는다. 대웅전은 거대한 바위 앞에 있다. 전통사찰의 면모를 보여주는 당우가 아니라서 조금은 섭섭하지만 강한 기맥을 느끼기에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현대식 구조가 아닌 전통의 구조로 다시 지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웅전 좌측으로 계단을 타고 오르면 허름한 건물이 있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니 바위면에 산신을 새겼다. 조금은 조잡한 선각으로 조성된 산신이지만 기도처로서는 부족하지 않다. 산신각 옆으로 난 바위틈으로 올라가면 크기가 약 8미터에 이르는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7미터에 육박하는 부처가 새겨져 있다. 용주사는 풍수적 관점에서 지어진 사찰로 인식될수 있는 사찰이다. 대웅전 앞을 바라보면 오래전에 심어져 바다바람을 막았을 것으로 보이는 풍수림이 있다. 지금은 10여그루 정도가 남았을 뿐이나 그 용도는 명백하다. 산정에 서서 바라보면 저멀리 바다에 떠 있는 쌍도 방향에서 용주사 방향으로 길게 홈이 파이듯 계곡이 파여져 있다. 그러나 가장 강한 기맥이 있는 곳이라 기맥까지는 무리가 없지만 바람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계곡을 타고 오르는 바다바람을 막고자 나무를 심은 것으로 보인다. 용주사로 이름을 바꾼 복성암은 전형적인 비보풍수와 신앙, 기도처의 기능을 지닌 다용도 사찰이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명성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상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진압풍수와 염승풍수의 기능을 지닌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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