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성은 달리 안흥진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근흥면 정죽1리 1112-1번지에 있다. 태안읍내에서 603번 도로를 타고 계속 달려 신진도로 들어가는 다리 좌측에 산성이 보인다. 안흥성은 근흥면 정죽리에 있는데. 조선조(朝鮮朝)의 효종(孝宗)6년(1655)에 축조(築造)된 석성(石城)으로서 둘레 1,568미터에 높이는 3.5미터다. 안흥성은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1호 지정되어 관리 중에 있는데, 동학혁명(東學革命) 때(1894)폐성되었다. 축성 목적은 국토 방위였으나, 이곳에 축성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경기사인(京畿士人) 김석견(金石堅)이 군왕(君王)께 상소하여 안흥진성의 축조를 청원하니, 군왕께서 직접 지경연사(知經筵事)인 이후원(李厚源)을 불러 안흥진성 축조의 필요성을 하문(下問)하였다. 이에 이후원은 주저치 않고 이곳의 지형이 해중(海中)으로 약 10여리 정도 돌출하여 있는 천연적인 요충지(要衝地)이므로, 이곳에 석성(石城)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호서(湖西)의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여 두면 안으로는 강도(江都)의 표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령(湖嶺) 지역을 공제(控制)할 것이라고 진언(進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군왕께서는 즉시 충청감사(忠淸監司)에게 하명하여 안흥진성을 축조케 하니, 태안(泰安)을 비롯하여 인근의 서령(瑞寧), 해미(海美), 덕산(德山), 예산(禮山), 당진(唐津), 면천(沔川), 홍주(洪州), 결성(結城), 보령(保寧), 남포(藍浦), 서천(舒川), 한산(韓山), 임천(林川), 홍산(鴻山), 청양(靑場), 청주(淸州), 충주(忠州), 등지(等地)의 18개 읍민(邑民)이 이에 동원 되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무려 10여년만에 축성된 안흥진성(安興鎭城)은 240년간 내려오다, 조선조(朝鮮朝)의 고종(高宗) 31년(1894) 동학혁명(東學革命)때 성내(城內)의 건물이 일부 타버리고, 이에 따라 성곽은 자연히 폐성되고 말았다. 현재 안흥진성으로 출입하는 입구는 계곡이다. 작은 누문이 있는데 마치 암굴같은 문이다. 안흥진성은 마치 뱀의 몸처럼 길에 이어진 산자락을 따라 길게 축성되어 있으며 산의 끝 부분에 태국사가 있다. 태국사는 근흥면 정죽리의 안흥성내 성동산(城東山)에 있는데, 창건연대( 創建 年代)는 미상(未詳)이다. 그러나 이 태국사의 창건을 둘러싼 여러 가지 설화(說話)가 전하여지고 있는데, 일설에 따르면 조선조(朝鮮朝)의 세종대왕(世宗大王)때 태안부사(泰安府使)의 꿈에 안흥항(安興港)의 바닷가에 상자(箱子)하나가 떠내려와 있으니, 즉시 이를 가져다 잘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꿈에서 깬 부사는 반신반의(半信 半疑 )하면서 아침 일찍 바닷가로 내려가 주위를 살펴보니, 현몽(現夢)한 대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속에는 금불상을 싼 보자기에 “기원 태평 국운(祈願 泰平 國運)”이라 쓰여 있었다. 이를 보고 기이(奇異)하게 여긴 부사는 이 내용을 즉시 국왕(國王)께 상주(上奏)하니, 국왕께서 특명을 내려 승려(僧侶)를 현지에 파견케 하였다. 왕명(王命)을 받고 현지에 내려온 승려는 곧 터를 잡아 절을 세우고 명칭(寺名)을 보자기에 쓰여 있는 태평 국운에서 태(泰)와 국(國)자를 따라 태국사(泰國寺)라 명명하고 금불상을 안치(安置)하니 이것이 오늘의 태국사라는 것이다. 이 태국사는 다른 일반사찰(一般 寺刹)과는 틀리는 점이 있다.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따르면 「태국사는 국란이 있을 때 주승이 수막대장의 명을 받아 수군이 있는 18읍의 각 사찰의 승군을 지휘할 수 있는데, 이때의 군사상의 직권은 첨절제사와 같다」고 하였다. 태국사의 입지는 독특하다. 애초에 어떤 목적에 의해 이처럼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두형으로 뻗어나간 지세의 목을 누르고 있다. 태국사에서 풀을 헤치고 바닷가 방향으로 나가면 전형적인 사두혈이 있으며 좌측으로 길게 나간 보룡은 성문에 해당하는 계곡의 누문 앞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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