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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섯 마리의 용이 춤추는 월사(月沙) 이정구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0-09 조회수 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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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선생 묘소를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평(嘉平)에는 태봉(胎峰)이라는 지명이 두 개가 있다. 그중 하나는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역이 있는 태봉리고 다른 하나는 청평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중간에 있는 상색리(上色里) 부근의 중종대왕(中宗大王)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울에서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역을 찾아간다고 하면 구리에서 방향을 틀어 퇴계원 방향으로 길을 선택해야한다. 서울 강남에서 찾아온다면 강변으로 달려 강동대교를 건너 구리 톨게이트를 거쳐 퇴계원 앞까지 한숨에 내달릴 수 있다.
퇴계원 부근에서 일동이라 쓰여진 길을 따라 퇴계원 외곽으로 난 47번 국도를 따라 달려야 한다. 광능내를 지나 내촌면 사무소 외곽도로를 달려 일동이라고 쓰여진 도로만 따라 달리면 된다.
한참을 달리면 비스듬한 언덕이 나온다. 언덕을 오르면 검문소가 나오고 길이 갈라진다.
서파 검문소에서 오른쪽으로 나가면 가평 현리다. 흔히 서파 검문소라 불리는 곳에서 현리로 이어지는 1차선 도로를 선택해야 한다. 왕복 4차선 도로에서 [현리]라는 표지판을 따라 길을 바꾸면 다시 길이 갈라지는데 우회전하면 명덕온천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가평군 상면에 다다른다.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번지에 있는 월사 이정구(1564~1635)의 묘소는 1984년에 경기도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그의 후손인 이명한(李明漢 1595~1645), 이일상(1612~1666), 이광수 등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장유(張維), 이식(李植), 신흠(申欽)과 함께 조선 중기 문장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역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장막처럼 쳐진 주산을 배경으로 길게 내려온 생룡에는 4기의 무덤이 있는데 가장 위에 자리잡은 묘는 월사 이정구의 묘가 아니고 이정구의 아들인 이명한의 묘다. 아버지의 묘보다 위에 있으니 흔히 역장(逆葬)이라 부르는 형태인 것이다.
두 번째 묘가 이정구의 묘다.
이 정구의 자는 성징이고 월사는 그의 호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그는 15세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선조 23년(1590)에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에 등용되었고, 임진왜란때에는 명과의 대외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호조판서,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을 거치면서 순탄한 관료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한문학의 대가로 서예에도 뛰어나며 조선중기 4대문장가 중의 한사람으로 시호는 문충이다.
이정구의 묘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명한(李明漢)의 자는 천장(天章)이고, 호는 백연이다. 선조 29년인 서기 1595년에 월사 이 정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2세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정자와 전적을 거쳐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예조판서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인조23년인 서기 1645년에 향년 51세에 영면하였고 시호는 문정이며, 묘는 상면 태봉리 월사의 묘 위에 있다.
세 번째에 자리한 이일상(李一相)의 자는 함경(咸卿)이요 호는 청호(靑湖)이며, 1612년 7얼 28일 월사 이정구의 손자이자 이조판서 이명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신동이라 하였으며, 17세시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연소하여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있다가 22세되던 해에 설서가 되면서부터 사관의 길로 들어가 검열을 거쳤으며, 효종으로 하여금 북벌계획을 수립토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1660년 현종이 임금에 오른뒤부터 대제학, 우참찬, 한성부판윤, 지의금부사, 춘추관사, 호조판서등 주요 요직을 거치다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향년 55세에 이르러 별세한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정구 선생의 묘 주위에는 찾아볼 것이 적지 않다 ,
연안이씨 삼세비각은 월사 이정구 선생 묘에 오르기 전 월사집 목판본을 관리하는 건물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정구, 이 명한, 이 일상의 신도비다.
역사상 3대(三代)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은 연안이씨 [월사(月沙)집]의 이정구(李廷龜), 이명한(李明漢), 이일상(李一相)와 광산김씨 [사계(沙溪)집]의 김만기(金萬基), 김진규(金鎭圭), 김양택(金陽澤)이 있으며, 달성서씨 [약봉(藥峰)집]의 서유신(徐有臣), 서영보(徐榮輔), 서기순(徐箕淳)이 있으며, 전주이씨 [백강(白江)집]의 이민서(李敏서), 이관명(李觀命). 이휘지(李徽之) 등 네 집뿐이었다.
묘역 입구에 자리한 건물 속에 보존되고 있는 월사집 목판은 연안이씨의 자랑이다. 월사집 목판은 1988년 3월 21일 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되었으며 상면 태봉리 산 115-1번지, 월사 이정구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장판각을 짓고 보관되고 있다.
월사집 목판은 인조14 년(1636)에 월사의 손자인 이익상이 판각한 것으로 현재는 모두 1,334판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묘역에 올라 묘제를 살펴보면 봉분을 향하여 오른쪽 바로 앞에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긴 댓돌로 쌓은 기단 1단이 있다. 이 기단 앞에 상석, 향석, 동자석, 망주석, 문관석 등 상석이 배치되어 있다. 이정구의 신도비는 1656년에 건립된 것으로 당시에 좌의정이던 김상헌이 시문을 짓고 전을 썼으며, 영의정이던 이경석이 글씨를 썼다.
이정구 선생의 묘역은 누가 보아도 눈에 뜨일 정도로 확연하다. 묘를 살펴보면 길게 늘어진 모양이라 언뜻 보면 설기(洩氣)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 터에는 묘가 4기나 자리 잡고 있다. 모두 혈심(穴心)에 자리한 것은 아니지만 1개 이상의 혈심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묘가 자리 잡은 산줄기의 후면에는 5개의 산이 마치 울타리처럼 두르고 서 있다.
오룡쟁주(五龍爭珠)!
다섯 봉우리가 마치 힘을 모아주는 듯 하다. 묘소의 뒤쪽에는 여러 개의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대부분 땅속에 묻혀있어 일부분만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또 부드러운 곡선으로 드러난 부분을 감싸고 있어 능히 귀석(貴石)이라 할 만하다. 앞쪽은 지나치게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으며 안산이 혈판의 높이와 비슷하다. 굽어봄도 없고 지나치게 낮지도 않으며 에워싼 모양이 아늑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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