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근의 묘는 가평군 상면 행현리에 있다. 행현리는 구리시에서 일동으로 가는 중간 신팔리에 있는 서파검문소에서 청평 검문소까지 이어지는 37번 도로 인근에 있다. 따라서 구리 방향에서 춘천으로 가다가 청평 건문소에서 현리 방향으로 향해도 된다. 서파 검문소 방향에서 다가가면 현리를 지나 청평 방향으로 계속 간다. 연하리와 대보리, 항사리를 지나면 임초리 입구가 나오는데 이 마을에는 [아침고요수목원]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약 5분 정도 가면 행현1리다. 수목원을 약 3키로 남겨둔 곳에 [연화세계]라 불리는 조계종 포교원이 있다. 포교원 뒤로 계속 난 좁은 길이 있는데 시멘트 포장이 되어 차량 1대 지나다닐 정도다. 이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집이 1채 있다. 이 집으로 들어가면 재실을 겸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곳곳에 화려한 글자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 집이 바로 묘역을 관리하는 후손의 집인데 8순이 넘은 노인이 집을 지키고 계신다. 작은 내를 건너 고추가 심어져 있는 밭을 지나 산으로 오르니 후손의 집과는 약 100여미터 아래쪽에 해당한다. 산을 올라 작은 골짜기를 지나니 묘역이 나타난다. 산등성이에 묘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지만 올라가보니 2기의 묘가 있다. 2기의 묘 중 위쪽이 김조근의 묘다. 특이하게도 2기의 묘가 모두 신분을 알려주는 어떤 흔적도 없다. 비석하나 없으니 찾기가 어렵다. 아래쪽 묘는 김조근의 둘째 아들이다. 김조근의 묘를 둘러본다. 김조근(金祖根)의 자는 백술(伯述)이요, 호는 자오(紫塢)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1793년 7월 1일 충주목사로 있던 김지순(金芝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김지순은 충주 탄금대에 묻혀있는데 와혈로 매우 좋은 혈이다. 1816년(순조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경주부판관을 거쳤으며 1837년(헌종 3) 승지(承旨)로 승진하였다. 이 때 그의 둘째딸이 헌종대왕의 비(妃)로 책봉되자 그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올랐다. 그 후 어영대장(御營大將), 호위대장(扈衛大將), 주사대장(舟師大將)등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과 함께 왕실의 외척으로서 쌍벽을 이루였으며 철종대왕 당시 안동김씨 세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844년(헌종 10) 1월 2일 향년 51세에 별세하였으며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효간(孝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명색이 무관으로 병권을 휘둘렀다는 김조근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의 묘에는 무인석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우선(右旋) 방향의 주룡에서 보이던 팔요풍(八요풍) 형태의 산곡(山谷)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곳에 묘를 쓴 이유는 아마도 주룡에서 보였던 팔요풍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안타까움도 있다. 자고로 묘역을 깊이 파는 것은 권세의 상징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연을 헤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군왕(郡王)의 묘는 십척(十尺)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이야기는 자연 상태로 두고 하는 말이다. 묘역을 넓히거나 크게 보이고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깊이 파는 것은 묘역을 파괴하는 일이다. 김조근의 묘도 애초에는 혈의 조건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넓히고 깊이 파는 과정에서 묘가 혈심을 벗어난 자리에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김조근의 묘 아래쪽에 자리한 묘역에도 역시 문무인석은 없다. 단지 망주석 2개만 서있다. 김조근의 둘째 아들이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살펴보니 김조근의 묘보다 훨씬 유려한 자리다. 그러나 좋은 혈판을 찾아놓고도 제대로 쓰지 못한 점은 아쉽다. 자고로 오대불가장지(五代不可葬地)에 편산(片山)이 속한다. 편산은 산이 좌우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으로 한쪽의 사면은 경사가 급하고 다른 방향은 완만한 경우다. 이 묘는 좌선 방향이 기울었음에도 묘를 썼다. 그러나 우측으로는 마치 혹이 달린 듯 살점이 붙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용맥이 나가는 방향으로 보아 좌측이 경사를 이룬 대신 오른쪽으로 살이 붙었다. 동글동글한 바위도 쌓여져 있다. 전형적인 잉혈(孕穴)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잉혈은 행룡간 주맥에 혈이 응결되는 형상이 아니고 주룡의 측면에 혈이 결지되는 것이다. 잉혈을 측유혈(側乳穴), 혹은 편유혈(偏乳穴)이라 불러 유혈의 일종으로 보았다. 과거의 기록을 살피면 잉혈, 혹은 잉육혈(孕育穴)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이 기록에 의하면 잉육혈은 유혈과 달리 잉혈의 측면으로 난 전순방향으로 좌향을 쓰라 했으니 유혈 형식으로 쓴 것은 잘못이다. 조선 후기 세도를 한 풍양조씨 조만영의 묘가 잉혈로서 좌향까지 바로쓴 묘라 할 것이다. 김조근의 둘째 아들이 모셔졌다는 이 묘는 혈판을 찾아놓고서도 잉혈이라는 사실을 몰라 제대로 쓰지 못한 결과다. 잉혈을 제대로 쓴다면 상하로 1미터 이상 좌우로 2미터 이상 이동해야만 정혈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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