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사라는 이름을 지닌 사찰은 많다. 어느 고장에 가나 크고 작은 사찰이 있고 그중 한 곳은 거의 용화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 정도로 용화라는 이름에는 불교의 향기가 묻어있다. 진천에도 용화사가 있는데 진천에서는 제법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된 용화사 석불입상이 있다. 용화사가 자리한 곳은 진천읍 신정리 584-4 번지인데 진천읍 진천고교 옆이라고 해야 찾아가기가 수월하다. 신라 성덕왕 19년에 만들어진 숭덕불상을 모시기 위하여 처음에는 미륵불당으로 세워졌으나 조선대에 와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할 때 절은 없어지고 석불만 외롭게 서 있다가 1959년에 기해 10월에 한자심에 의해 법당, 요사채를 각3간씩 짓고 1965년 을사 10월에 법당을 중수하고 용화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용화사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입구를 들어서면 대웅전 격인 건물이 보이는데 특이한 간판이 붙어있다. 보통의 경우 주불전은 대웅전이나 극락보전이라 적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부가범전(簿伽梵殿)이라고 적혀 있다. 처음 보는 불전이라 조금은 의아한데 새로 지은 건물이라 고졸미는 떨어진다. 부가범전을 지나면 정면에 매우 큰 키의 석불을 만나게 된다. 이 미륵불은 화강암으로 된 불상으로 높이 7.05m, 아래부분의 폭이 1.7m가 된다. 불상의 목 부분에는 영락줄(목, 팔 등에 두르는 구슬을 꿴 장식품)이 있고 손에는 연꽃을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김유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숭덕불상이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신라시대에 길상사의 제향을 국제로 하였고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예를 따라 국제로 건립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불상이 있는 사찰은 신라 성덕왕19년(720)에 창건되어 고려말에 폐사되었다가 지금의 용화사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진천읍의 수호신 이라고도 하는데 상산지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한양을 향하여 북진할 때 이 불상 맞은편인 삼덕리에 진영을 갖추고 진천읍으로 침입할 때 적장이 바라보니 키가 10여척이나 되는 일원대장이 우뚝 서 있어 그 위풍에 놀란 왜병들이 대적할 뜻을 잃고 물러가 진천읍은 그 화를 면했다고 한다. 석불에 신령스러움이 깃들인 설화다. 또 눈에 뜨이는 것은 여래전(如來殿). 앙증맞게 작은 여래전은 백담사의 삼성각을 연상시키는데 금동여래불이 주석하고 계신다. 고개를 숙여 가벼운 배례를 할 수 있다. 용화사는 전체적으로 개활지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이 많지도 않고 물이 범람하여 피해를 입힐 지역도 아니다. 용화사가 어떤 비보의 목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여 지지는 않는다. 미륵불당으로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처럼 신앙의 목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김유신 장군과의 연계성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제례적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도 생각되어지는 곳이다. 이는 사찰이 제례와 관계가 있으며 숭모정신과도 관계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같은 사상은 전통사상과도 연계가 되고 긍극적으로 풍수사상과도 연계가 된다. 풍수사상은 드러나지 않지만 전체적인 배치는 전형적인 풍수적인 사상에 입각하고 있다. 즉 주변이 벌판이라 하지만 작은 야산을 등에 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법칙을 유지하고 있으며 용화사의 뒤를 가리는 산은 백곡 방향에서 흘러내려오는 백곡천을 가리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전형이다. 단지 앞이 지나치게 트여 교쇄를 이루지 못한 것이 흠이라 할 수 있다.이곳에 세워진 불상이 벌어진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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