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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익필 선생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0-09 조회수 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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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송익필 (宋翼弼,1534~1599)선생의 묘를 찾으려면 입한재를 찾거나 구봉선생의 묘에 대해 촌로들에 물어봄이 빠른 방법이다. 입한재는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재각(齋閣)이다. 구봉은 예학(禮學) 및 문장의 대가이었으나 후예가 한미(寒微)하여 제향도 모시지 못하였는데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가 1720년 입한재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1802년에 당진현감 민백준(閔百準)이 녹봉(祿俸)을 희사하여 재실(재실)을 보수하였고 1835년 4월 25일 당진현감 민익현(閔翼顯)이 재실을 중건하고 묘직(墓直:)을 복호(復戶)하였다.
당진에서 당진군 농업기술센터를 찾으면 그다음은 아주 편하게 찾을 수 있다. 당진군 기술센터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보면 왼쪽 산기슭에 입한재가 보인다. 입한제 좌측 산기슭에 구봉 선생의 묘역이 있다.
구봉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교하면 심악산 밑에서 태어났으며, 산남리에 유허비가 있다. 양주출생으로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현승, 본관은 려산(礪山), 판관을 지낸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아버지 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오름에 따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처음부터 과업을 포기하고 성리학과 문학에 전념하여 학자로 대성하여 김장생, 김집, 정엽, 서성, 정홍명, 강찬, 김반 등의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정치에도 관여하여 재야에서 서인의 막후실력자로 활동하였다. 1586년(선조 19) 동인들에 의해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져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등의 동인들이 제거되자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해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 조헌(趙憲)이 동인을 공격하는 소를 올렸을 때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사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극변(極邊)에 유배되었다. 1592년 희천(熙川) 배소에서 임진왜란을 만나 명문산(明文山)에 들어가 난을 피하였으며, 이듬해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거처 없이 친구, 문인 집을 떠돌다가 충청도 면천(沔川) 김진려(金進礪)의 집에서 죽었다.
당대의 유학자인 이이, 성혼 등과 교류하며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문학도 능하여 이산해,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순신(李純臣),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당대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 사후 문인들이 학덕을 추모하여 상소한 끝에 지평을 추증했고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龜峯集)이 전한다.
당대의 유학자라지만 묘역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 모두 명당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당진 지역의 인물들 대부분이 구봉선생과 같은 비슷한 묘역을 가지고 있다.
남이흥 장군이 그렇고 구인문(具人文)이 그렇다.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커다란 산 밑의 전순에 해당하는 산허리에 묘역을 만들었으니 건수가 들것이 틀림없고 좌측에는 작은 물골이 있어 장마 때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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