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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성 풍수의 백미 숭례문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0-09 조회수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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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서울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 원래 이름이다.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 되었다.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가 세 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다.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명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지다가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는데, 숭례문이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
한편 채수(蔡壽)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숭례문을 증수할 때 중국의 예에 의하여 문 밖에 옹성(甕城)도 쌓자고 하였으나, 성종이 "우리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일일이 중국을 본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숭례문까지 쳐들어온다면 그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니 옹성이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답하여 흥미롭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광무(光武)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파괴가 가속화되었고, 특히 숭례문 남쪽으로부터 남산이 정상에 이르는 성벽은 남산광장에 일제가 소위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전연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남산광장에서 정상에 이르는 도보 길에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ㆍ측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 성내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불과 몇 채 안 남은 건물 중의 하나로 비교적 고려 말 이래의 다포(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풍수적으로 이 남대문은 남대문이 아니고 남서문이 옳다. 즉 한양의 곤문(坤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특히 이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여겨지는데 남쪽에 위치한 것은 아니다. 종로에 도성의 중심돌이 있다. 이 돌이 현대의 서울 중심돌이 아니고 도성을 지을 당시 한양 중심돌이다. 이 중심돌을 기준으로 하면 한양은 서사택국으로 지어진 도성이다.
서사택국은 서, 북서, 남서, 북동방이 서사택국에 들어가는데 이 배치에서 숭례문은 정문을 의미하며 남서방에 해당한다. 남서방은 오행상 금에 해당하며 사람으로는 노모, 그리고 숫자로는 0과 5를 의미하는 충만된 기운을 의미한다. 노모가 문을 지킴으로서 황실의 재물을 보호하고 쉽게 나가지 말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 도성은 귀함보다는 재물을 중히 여긴 것이며 이는 일국을 다스리기 위한 재물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이 숭례문은 글자에서도 풍수의 전형을 볼수 있는데 숭(崇)은 불타오르는 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글씨고 례(禮)는 오행상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다.
따라서 승례문은 활활 타오르는 글자를 의미하고 종으로 현판을 단 것도 화형(火形)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을 의미하는 글자를 사용하고 형상마저 불에 근거한 형상을 만든 것은 도성의 조산인 관악산이 화형체인 것에 이유가 있다. 풍수에서 화형체는 화산(火山), 화성(火星)이라고 부르는데 화기를 내포하고 있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도성에 불을 낸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궁성에는 불을 제어할 수 있는 물을 담은 기구를 설치하거나 물의 상징인 해태를 조각하여 배치했다. 즉 근거리에서는 물을 제어할 수 있는 비보풍수를 하였지만 도성의 문에는 오히려 적극적인 방법을 취했다. 즉, 작은 불은 물로 잡지만 큰 불은 맞불을 놓듯 숭례문에 큰 불을 형상하는 풍수적 배치를 함으로서 맞불로서 화기를 억누르려는 풍수적 비보를 하였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다시 관광 목적의 출입이 허용되고 있으며 도로의 개축과 도시화에 밀려 유지보수가 어려웠지만 차길을 돌리고 보수를 하였다.풍수는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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