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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슴이 뛰는 하조대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0-11 조회수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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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하조대는 고려 말엽 하륜, 조준 두 사람이 은거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하조대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깍아 지른 바닷가 절벽위에 자리 잡은 작은 정자지만 그 풍경이 아주 일품이다.
하조대는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에 있으며 북쪽 해안가로는 하조대 해수욕장이 있고 남쪽으로는 기사문항과 38선이 있다.
하조대는 해변에 기암절벽이 우뚝 솟고 노송이 어울려서 경승을 이루고 있는데,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청유(淸遊)하였던 데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하조대에 도착하면 좌측으로는 하얀 등대가 솔 숲 위로 살며시 머리를 내밀고 있고 우측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절벽 위에 하조대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육각정(1955년 건립)이 있다.

하륜(河崙) 과 조준(趙浚) 이들 두 사람이 이곳 하조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가 기울어져 나라안이 어지러웠을 때, 벼슬살이를 하던 두사람은 나라의 정세로 보아 고려왕조의 왕통이 그대로 지탱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새로운 왕조를 건립해야 하겠다는 뜻을 품고 벼슬을 버리고 경치가 좋다는 이곳으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두사람은 새왕조 건립의 모사를 했으며,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고 전한다. 이 후 그들이 머물러 있었던 것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성을 따 하조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륜(1347~1416 )은 이색의 제자로서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고려의 신하로 최영장군의 요동정벌에 반대하여 유배되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복권되었다. 조선 건국 후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여 중지시켰고, 정도전과 대립하여 이방원을 적극 지지하였다.
70세로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중국 한나라의 장량(한고조 유방을 도운 지략가)에 비교하기도 한다.

조준(趙浚, 1346~1405)은 하륜에 비교하여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본관은 평양(平壤)으로, 자가 명중(明仲), 호는 우재(齋), 송당(松堂)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1374년(우왕 즉위) 문과에 급제한 뒤 좌우위호군 겸 통례문부사(左右衛護軍兼通禮門副使)가 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 지제교(知製敎) 등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랐다.

하조대는 크게 등대와 정자의 두개 공간으로 구성되었다.등대에서 바라보는 하조대 해수욕장의 전경과 하조대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의 전경은 최상이다.
중요한 곳은 등대가 아니라 정자다.풍수를 배운 사람은 낙산사에 있는 의상대가 대단한 혈처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조대 정자의 자리도 의상대에 결코 뒤지지 않는 대단한 혈처다.
좌선익이 발달했기 때문에 크게 휘어진 기맥이 돗보이고 좌우로 나온 4기의 지각은 이 혈의 가치를 증명해준다. 약 30미터 이상의 가는 기맥이 길게 뻗어나가 언뜻 보아서는 사룡으로 보이기도 하나 기복이 있고 우측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보룡이 있어 강한 기맥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에 지각이 있으니 돌혈이다. 기맥이 뻗어나가는 방향이 좌향이다. 기맥이 뻗어나가는 방향으로는 바위산이 솟아올라 안산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사두혈 앞의 청와안(靑蛙案)이니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사두형 돌혈이라 하겠다. 다만, 늘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작은 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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