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호인 서울 흥인지문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으로서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東)에 해당하므로 흥인(興仁)은 곧 동방을 의미한다. 또한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철종 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고쳐 짓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 흥인지문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천장은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흥인지문 주변의 성벽은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융희 2년(1908) 3월부터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광무 3년(1899) 5월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이곳을 지나가게 하였다.
풍수적인 의미에서의 흥인지문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풍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훌륭한 교과서가 되어준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도성을 둘러싼 성벽에 달린 다른 문은 모두 세 글자로 이루어졌는데 유독 흥인지문만 네 글자다. 흥인문의 양옆은 허전하게 비어있고 자동차길이 들어서 있다. 때문에 접근도 쉽지 않다. 자동차에 흥인지문이 포위당하고 있다. 그 한편으로는 이대부속병원이, 반대쪽은 평화시장이 들어서 있다. 과거와는 어찌 다를까? 옛날 도성이 살아있던 시절 흥인문의 양 날개는 어떻게 이어졌을까. 1880년대에 찍은 동대문 사진을 보면 이때까지는 조선왕조의 힘이 약화되기 전이라 도성이 깨끗이 관리되고 있다. 사실 후인이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이야기와 각종 자료를 종합해 판단해 보면 일제시대 전차 개통 당시에는 성벽을 헐지 않고 성문으로 레일을 깔았다고 한다.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일제는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사실 동대문은 낙산 끝에 자리하고 있는데 급격하게 끊어졌다.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잘 파악이 되지 않지만 이대부속병윈 아래로 낙산 줄기가 이어졌지만 급격하게 떨어져 허해진 모습이 이어진 것이다. 성벽으로 이어 문을 만들기까지는 했지만 긍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낙산 줄기가 지나치게 짧아 허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성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여러 가지 비보를 하였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동대문에 쓴 “興仁之門”이라는 글자다. 다른 문은 모두 3자로 이루러져 있는데 유독 4자로 쓴 것은 비로 풍수적으로 낙산을 잇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글을 이어지도록 사용한 지(之)자는 풍수에서 산을 의미하는 글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이대부속병원 방향에서 끊어진 맥을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그처럼 글자를 썼던 것이다.
또 한가지는 일본인들에 의해 사라졌지만...... 산이 열려 동쪽이 허(虛)하다 해서 주변을 흐르던 청계천에서 중설토를 날라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자리에 가산(假山)을 쌓았는데 이는 동쪽이 허약하므로 보충한다는 목적과 산을 잇는다는 목적, 그리고 내당수인 청계천 준설을 통해 늘 깨끗한 물을 흐르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이는 극히 자연적이고도 풍수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데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풍수적으로 약한 곳을 보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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