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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감이 느껴지는 민영환 묘역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0-16 조회수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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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만고의 충신 민영환(閔泳煥)의 묘소는 용인시 구성면 마북리 구성초등학교 뒷편 산기슭에 있다. 본래 수지면 풍덕천리 토월마을에 봉분 없이 평장 되었던 것을 1942년에 후손들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1959년 3월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수원 나들목에서 고속도로 밑을 지나 첫 번째 사거리에서 우회전 한다. 이 도로는 23번 도로다. 23번 도로를 이용해 서울 방향으로 이동하다 보면 영동고속도로다. 이 영동고속도로 밑으로 통과해서 약 500여미터를 가면 오른쪽으로 구성읍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나타난다. 구성읍으로 들어가다 보면 좌측으로 구성초등학교가 보이고 이 뒤로 제법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묘역이 보인다.
묘역 앞에는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친필 제자(題字)와 그가 자결하였을 때 남긴 유서(遺書)도 함께 각자해 놓았다.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슬프다 국치와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속에서 보다 멸망하게 되었다. 무릇살고자 하는 자는 반듯이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반듯이 생을 득하는 것을 제공은 어찌양해하지 못하냐뇨. 영화는 다만 을사를 결함으로서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동포에게 사죄 하노라 영화는 죽었다 하여도 죽은 것이 아니라 제군을 구천지하에서 기필코 도울 것이다. 부디 우리 동포형제는 천만으로 분려를 배가하여 지기를 굳게 하고 학문을 힘쓰고 결심륙력하여 우리의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사자가 마땅히 명명지중에서 희소할 것이니 슬프다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결고하노라 .

묘역은 크게 양분하여 계단으로 오르게 하고, 곡담을 높게 쌓은 것이 특이하다. 1974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묘소에는 상석을 비롯하여 문관석 2기, 망주석 2기, 장명등 1좌가 있다. 봉분의 높이는 약 2m정도고 직경은 6.5m로서 작지 않은 규모다.
그렇다면 민영환은 누구인가?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은 1861(철종 12)∼1905(고종 42)년 사이에 이땅을 살고 간 조선의 문신이며 순국지사다. 자는 문약(文若)이며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민영환은 조선 말 18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흥성대원군의 장인인 민치구(致久)가 조부이고, 병조 판서 민겸호(閔謙鎬)가 생부이나, 큰아버지인 여성부원군 민태호(泰鎬)에게 입양되었다. 고종(高宗)과는 고종 사촌간이며 명성왕후 민씨의 조카가 된다.
민영환은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追贈)되었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저술로는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다.

민영환의 묘는혈이 아니다. 당판조차 구비되지 못했고 지나치게 깊게 팠다. 주변에 나무가 잘 자라고 있으며 언뜻 보아 용맥의 모습이 보이니 그럴듯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비혈일 뿐 아니라 수기(水氣)도 많다.
주위가 온통 도시의 개발로 얼룩져 있고 기맥이 유통되는 용맥의 흔적은 뒤에서 잘려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주위도 온통 어지럽다. 특별한 사격도 없으며 주위가 도시로 형성되어 공기의 유통조차 끊어져 있다. 사실, 당판이 구비되지 못한 혈은 주위에 아무리 뛰어난 사격이 있어도 소용없으니 장지(葬地)로서는 합당하지 못한 곳이다.
문화재가 아니라면 차라리 이장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역사적 가치 이상의 풍수적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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