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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진주성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0-16 조회수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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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진주성은 시내 중심부에 있다. 진주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진주성 또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진주성이 백제 때의 거열성(居列城)터였다고 하지만, 진주성을 언제 쌓은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사료에 의하면 고려 말인 우왕 3년(1377)에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에 걸쳐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가운데 1차 전투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히는 진주성싸움이다. 이 전투는 권율장군 주도의 행주산성 싸움이나 이순신 장군이 이끈 한산대첩과 비견될 수 있는 전투로 세계 어느나라의 역사에서도 보기 힘든 대전과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웅장한 촉석루가 옆으로 비껴서 남강을 굽어보고 있다. 대단히 큰 누각이다. 본성동과 남성동에 걸쳐 있는 진주성 안에는 각종 유물이 남아있다. 진주성이라고 하면 촉석루만 생각하기 쉬운데 진주성은 적을 막기 위한 시설로 성의 모습은 물론이고 내부에는 진주성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이는 문화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촉석루 오른쪽에 자리한 의기사(義妓祠), 촉석루와 의기사 후면의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김시민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가 나란히 서 있는 정충단(旌忠壇), 북장대(北將臺), 서장대(西將臺),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 창렬사(彰烈祠), 호국사(護國寺) 등의 유적들이 있으며, 이 일대가 사적 제118호로 지정돼 있다.

촉석루는 진주성의 성문인 촉석문과 가깝다.촉석루 아래로 바위가 단단하게 받치고 있다. 바위는 절벽이 아니라 약간 앞으로 나간 형태다. 이 벼랑 앞으로 의암이 있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난 곳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니곧 돌(突)의 형상이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 방향에서 기맥이 들어와 돌출 되었으니 사람의 손이 타기 전의 모습은 아마도 유돌혈상(乳突穴象)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촉석루 바로 옆에 있는 의기사는 논개의 사당으로 영조 16년(1739)에 처음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기사 옆에 있는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국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을 기린 비다.

촉석루 맞은 편에 나란히 서 있는 정충단은 숙종 12년(1686)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마련한 제단이다.

최근에 만들어놓은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癸巳殉義壇) 앞쪽 마당에 두 개의 위령비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3장사라고 일컫는 김천일(金千鎰)·황진(黃進)·최경회(崔慶會) 및 그들과 함께 똘똘 뭉쳐 싸워 장렬하게 순국한 군관민의 영령을 기리는 촉석정충단비며, 또 하나는 제1차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끌어낸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기린 김시민장군전공비다. 김시민장군전공비는 광해군 11년(1619)에 세웠다.
김시민장군의 묘역은 음성에 있다.

진주성내 중심부 언덕에 솟아 있는 문루는 진주성의 동문으로, 고종 32년(1895)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될 때 관찰사 청사(廳舍)의 관문이었으며, 영남 포정사라 하였다. 대변루(待變樓),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렸다.

진주성 북쪽 제일 끝 높은 곳에 있어 성벽 바로 밑은 물론 성 안팎을 두루 살피며 지휘할 수 있는 요지에 세워진 북장대는 군사건물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잘 건축된 망루이다. 임진왜란 때 망가진 것을 광해군 10년(1618)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남이흥 장군의 묘는 당진에 있다.
진남루(鎭南樓), 공북루(拱北樓)라는 별칭도 있다. 누각 안쪽에서 보면 진남루라는 글씨 현판이 선명하다.

북장대에서 국립진주박물관 뒤쪽으로 난 성벽을 따라 돌면 창렬사와 호국사와 서장대를 볼 수 있다. 창렬사는 김시민과 김천일·황진·최경회 등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며, 호국사는 원래 산성사(山城寺)로 고려 때 성을 고쳐 쌓으면서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이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승병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 전사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호국사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이같이 성 내부에 절이 있는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는데 서울 인근의 남한산성은 절이 3개나 된다.
이 같은 시설은 평시 승려들이 절을 지키고 방어하며 보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불교는 호국불교라 하며 종교이전에 민족 사수와 국가보위의 역활을 맡아 오고 있음을 보여준는 실례다.
북한 산성의 경우에도 적지 않은 사찰이 존재하는데 이 사찰들도 역시 성을 방어하기 위한 승병이 거주하던 시설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호국사 앞의 승병나무를 보고 오르면 포루다. 포루(砲樓)는 성벽의 일부를 돌출 시켜 치성과 비슷하게 하면서 안쪽을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를 감추어 두었다가 적을 공격하도록 만든 것으로 포루(砲壘)라고 한다. 수원의 화성과 강화도의 유적에 가면 볼 수 있다.
진주성의 포루는 애초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개축되었다. 진주성을 방어하던 포진지며 선조 40년(1607)년에 진주성의 내, 외성에 포루 12좌를 설치하였으나 1969년 진주성을 복원하며 상징적으로 1개소를 복원했다.

포루를 살펴보면 기맥의 흐름이 느껴진다. 기맥은 공북문 방향에서 북장대 방향으로 이어져 왔으며 포루에서 크게 꺾여 호국사 앞의 암문으로 뻗어나간다. 이에 포루에서 강하게 꺾이는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돌출된 하나의 혈판을 만들었으니 이는 분명 잉혈이다. 기의 강한 기운으로 맺히는 유혈의 변형인 잉혈위에 누각이 있다.

서장대는 성의 서쪽 구역을 경계하는 문루다. 서장대의 기맥은 포루방향이 아니라 호국사의 주산격인 호국사 뒷산에서 이어지고 있다. 사람의 손을 타서 그 원형이 많이 변했지만 기맥의 모습은 완연하다. 자세히 보면 용맥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데 포루에서 이어진 지각과 서장대를 지나친 지각에 호국사 앞에서 마주하니 한문(閑門)이 이루어졌다.
서장대는 유혈이다. 잉혈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혈판으로 화심(花心) 위에 누각을 앉힌 것이다. 한국의 산성이 지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산성의 높은 지역, 즉 누각이나 산성의 문이 자리하는 돌형(突形)의 경우 혈의 특징을 지니는데 서장대도 이와 다를바 없다.
호국의 역사가 남아있는 진주성. 가슴으로 다가오는 진주성을 찾아 보면 촉석루와 서장대, 포루를 눈여겨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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