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은 문화재가 많기로 모자람이 없다. 강상과 강하에는 김자지, 김여지의 묘가 있고 류관 묘가 있다. 이 두개의 묘가 강상과 강하의 묘역을 대표하고 있으며 김자지와 김여지의 묘는 한 곳에 있어, 가족묘의 특징을 보여준다. 양평에서 양평대교를 건너 광주시로 향하는 88번 도로를 이용해 10여키로미터를 내달리면 바탕골소극장이 나타난다. 이곳이 왕창리입구인데 이곳에서 항금리방향으로 난 길로 좌회전하여 약 3킬로를 들어가면 우측 작은 개울 건너에 묘역이 있다. 동오리와 경계지역에 가까운 곳이므로 찾기가 어렵지 않고 길옆에는 [연안김씨]세장을 알리는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개울 건너 여러개의 신도비가 있고 산자락 능선을 따라 묘역이 보인다. 김자지와 김여지의 묘역은 아래에서 두 번째에 자리하고 나란히 있다. 이중 김자지의 묘역은 원형분으로 정면에서 보아 우측이다.
김자지(1367∼1435)선생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文臣)으로 호는 일계(逸溪), 자(字)는 원명(元明),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으로 밀직제학(密直提學) 도(濤)의 장자(長子)다. 고려 우왕(禑王) 11년(1385) 문과에 급제한 뒤 조선 태종(太宗) 8년(1408)에 형조참의(刑曹參議), 태종17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세종2년(1420)에 대사헌(大司憲)에 올랐고, 그 뒤 원주목사(原州牧使), 평안도 관찰사에 이어. 세종10년(1428) 형조판서(刑曹判書)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를 역임했다. 특히 대사헌(大司憲)재직시에는 당대의 방자(放恣)한 세도공신(勢道功臣)을 탄핵하기 위해서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려서 세인을 놀라게 한일은 유명하다. 선생은 학문에 뛰어나 음양(陰陽) 복서(卜筮)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 음률(音律) 등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준재이고 박학한 학자였습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선생의 묘는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와 쌍분(雙墳)이다.
김여지(金汝知)(1370∼1425) 선생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문신으로서 호는 창주(滄州), 자는 자행(子行), 밀직제학 도(密直提學 濤)의 아들이다. 창왕(昌王)1년(1389) 문과(文科)에 장원한 뒤 정언(正言), 사헌규정(司憲糾正)등을 역임했다. 조선 태종(太宗)때 장령(掌令),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집의(執義)를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라 문란(紊亂)했던 호패법(號牌法)을 개정했다. 1418년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세종7년(1425) 예조판서,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묘는 부인 서계이씨(西溪李氏), 초계정씨(草溪鄭氏)와 합장 하였다. 묘 앞의 화강암 소형 구비(小型 舊碑)는 앞면에 음각이 있고, 뒷면에 기명(記銘)으로 보아 세종7년 (1425)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자지와 김여지의 묘는 당시 가족묘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의 가족묘는 좌우로 넓게 만들어 사용하고 있으나 당시의 가족묘는 가능한 능선상에 만들었다.
이 마을은 애초에 왕창이 아니라 왕충이었다고 한다. 세종의 묘를 옮기기 위해 전국적으로 지사들을 내보내었을 당시, 장례이위원장격인 사람이 임자지였다. 당시 김자지는 이 땅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고 왕에게 충성을 할 것인지, 가문을 일으킬 것인지 고민 하였다. 사실 풍수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다면 고민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김자지가 왕에게 이 땅에서는 벌레가 나온다고 보고했고 세종의 천장은 여주로 정해졌다. 실록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예종이 세종의 묘를 천장하려고 했을 때, 가장 믿었던 사람은 당대의 관상감 안효례였다. 사실 모든 임무를 안효례에게 주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예종의 선조인 세조도 풍수에서는 안효례만을 믿었다. 아무튼 이러한 이야기는 적지 않다. 자신의 조상들이 묻힌 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왕과 연관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혹은 무학이나 도선국사의 이야기를 화두로 삼기도 한다. 풍수를 배우고 익힌 사람들 대부분은 김자지와 김여지의 묘가 혈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지나치게 넓은 용맥에는 혈이 형성되지 않는 것은 기본 이치이고, 묘역 조성에서 지나치게 좌우로 넓게 펼쳐 여러기의 묘역을 조성하는 것은 기를 무시했거나 풍수의 이치를 망각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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