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관 묘는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에 있다. 동오리는 매우 깊숙한 산골이라 큰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마을이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은 법이고 명당도 있다는 선인이 말이 그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묘역이 류관 묘역이다.
앵평에서 광주에 이르는 88번 도로를 이용해 양평에서 퇴촌을 거쳐 광주방향으로 강하면 사무소를 지나 약 1킬로미터를 가면 바탕골을 끼고 좌회전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골짜기 안으로 약 7킬로미터 정도를 들어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동오1리다. 이 마을 입구에 성관음사를 알리는 간판이 여럿 나온다. 마을 입구에서 성관음사 입구 방향으로 큰 신도비가 보인다. 그 신도비 뒤로 약 400미터를 가면 류관 묘가 있다.
류관선생(柳寬先生)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인(文人)으로 충목왕2년(1346)에 출생하여 세종15년(1433) 졸(卒)하였다. 자(字)는 경부(敬夫)이며, 호(號)는 하정(夏亭)이다. 공민왕 20년(1371)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조선(朝鮮)이 개창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태종대(太宗代)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이때 태조실록(太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세종6년(1424)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고려사(高麗史)]를 수교(讐校), 찬진(撰進)하였다. 세종대(世宗代)에 청백리(淸白吏)에 록선(錄選)되었는데, 학문(學問)에 뛰어났고 시문(詩文)에도 능통하였다.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선생의 묘소는 양평군(楊平郡) 강하면(江下面) 동오리(東梧里)의 남향(南向)언덕에 있는데 1981년 기념물(記念物)로 지정되었다. 묘역의 규모는 약250평(坪)정도로서 묘(墓)는 부인(夫人)의 묘(墓)와 쌍분(雙墳)이다. 봉분의 형태는 장방형(長方形)으로 되어 있으며 둘레는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재료는 화강암(花崗巖)이다. 봉분 앞에는 각각 묘비(墓碑)와 상석(床石)이 배치되었으며, 그 앞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횡(橫)으로 쌓아 구분하였다. 단 아래에는 중앙에 장명등(長明燈)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이 갖추어져 있다. 선생의 묘소는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소 아래에 있고, 비문(碑文)은 신석우(申錫愚)가 짓고 김홍집(金弘集)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233.5㎝, 폭 67.5㎝, 두께 24.5㎝이다.
묘의 특징은 입수가 넓게 퍼졌다는 것이다. 입수가 퍼지면 불배합을 이루며 입수가 부실하면 혈을 결지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전순이 합해지면 이는 혈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묘역 앞의 안산이다. 류관 묘역 앞에는 작은 산이 하나 솟아올라 안산을 이루었다. 후손들이 이곳에 회양목을 심고 소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다. 문제는 이 안산이 어느 기맥을 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 안산이 내청룡의 맥이 앞으로 뻗어나가 형성 되었다고 말한다. 내청룡은 묘역과 유사한 길이를 지니고 있고 산신 제단을 앞에 두고 있다. 만약 이 기맥을 타고 있다면 은맥의 형상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특히 이 안산은 혈상을 이루고 있다. 다른 주장은 묘역에서 좌선이 발달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류관의 묘역은 힘이 있고, 좌선익이 발달하여 길게 뻗어 마치 개각처럼 자랐거나 혹은 기맥이 이곳으로 뻗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류관의 묘는 유혈이 아니라 겸혈이나 잉혈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 주장이 옳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기맥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기맥의 형상에 따라 혈형(穴形)도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혈의 경중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 류관의 묘역이 커 보이기는 하지만 안산으로 삼은 산 덩어리가 훨씬 큰 힘을 지닌 유려한 혈처임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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