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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탐라왕자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1-27 조회수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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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깊숙하게 숨어있는 탐라왕자의 묘
하원동 21번지에 탐라왕자묘가 있다.법화사지에서 서귀포시로 돌아가는 길에 탐라왕자묘를 알리는 간판이 있다. 큰 길에서 약 2킬로를 따라 귤밭으로 들어가면 묘역이 있다.
제주 묘제변천 연구에 귀중한 사료인 서귀포시 하원동 탐라왕자묘가 제주도기념물 54호로 지정된 것은 2000년이다.
하원동 탐라왕자묘는 지난 1998년과 1999년 제주사정립사업추진협의회와 제주대박물관의 두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결과 잘 다듬어진 석재로 4∼8단의 판석과 할석으로 축조된 방형석곽묘와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사용했던 도자기편과 소옥(小玉),지적좌대,석재향료 21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축조시기는 분청사기 및 초기 백자등의 출토와 방형묘제가 사용됐던 점으로 미뤄 고려 말에서 조선초(13∼15세기) 탐라국의 성주 또는 왕자 등 상당한 고위층의 묘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
탐라국에서 성주, 왕자(星主, 王子)는 탐라국시대(耽羅國時代. 서기 476~1005)의 왕족을 나타내는 작위(爵位)로서 성주는 탐라국왕(耽羅國王)을 말한다. 고후.고청.고계(高厚.高淸.高季) 등 3인이 신라로부터 처음 작위를 받아 세습된 1270년부터는 왕자인 경우 문창우(文昌祐)가 세습하여 왔으나, 조선조 태종 2년(1402년)부터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다.
왕자묘는 모두 3기다. 사이사이에 담으로 둘러쳐진 묘가 2기 있는데 이중의 하나는 고씨의 묘로 조선시데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후손이 조상의 묘 사이에 묘를 쓴 격이다.
이곳의 왕자묘에 대한 기록은 이원조(李源祚) 제주목사가 지은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1842년) 대정현 고적조(大靜縣 古蹟條)에 “왕자묘는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고, 궁산(弓山) 양쪽 하천(河川) 사이에 3기가 있다”고 기록되 있다. 그러나 왕자묘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육지와 제주도의 풍수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물빠짐이다. 육지에서 특히 우려할 것은 묘 안으로 물이 들어가는 건수(乾水). 혹은 황천수다. 그러나 제주도는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비가 오면 신속하게 빠져 지하로 스며드는 특징이 있어 건수가 드는 경우는 극히 드믈다.
또한 가지는 제주도의 기맥이다. 한라산은 매우 높은 산이다. 제주도 어느곳에서도 한라산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높은 산이 가까이 있음에도 능선이나 지각은 지극히 넓게 퍼진 형상을 지니고 있어 육지의 풍수인들이 생각할 때는 전혀 용맥이 힘을 쓰지 못하는 듯 하다. 그러나 제주도의 산이 지니는 특징으로 이해하고 기맥을 따라야 한다.
왕자의 묘는 능선상에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다만 좌우측이 넓이가 다른데 이는 좌선 방향의 산을 깎아 귤밭을 가깝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귤밭이 없다면 균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능선이 균형을 이룬다고 해서 묘가 혈이라는 것은 아니다.
3기의 묘는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니고 있는데 우선 가장 위쪽의 묘는 돌로 둘러싸인 묘역 위에 있으며 위쪽이 지나치게 넓고 평평하다. 그러나 우측을 보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지각이 보이는데 이것으로 보아 선익이 발달한 것으로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자리하지는 못했다.
2호분으로 불리는 묘는 중앙에 있는데 위아래로 돌로 쌓은 묘에 막혀있다. 2호분에서 보면 좌우의 균형이 맞으며 약간 넓은 듯 보이기는 하나 뭉쳐진 형국을 볼 수 있다. 약간 기울기가 있다고는 하나 약간 주저앉은 듯한 모습이 안정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산아래쪽으로 자리란 왕자 묘는 기울기가 심하며 급격하다. 기맥의 흐름은 용의 흐름과 일치하며 기울기가 심하면 역시 기가 뭉치지 못한다. 혈이란 기가 행룡을 따라 가다가 물을 만나거나 당판을 이루어 멈추는 것이나 기울기가 심하면 멈추지 않는다. 산맥 가장 아래의 왕자묘는 중간에 자리한 2호분의 전순에 해당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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