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고속도로 종점에서 빠져나와 84번 지방도로를 타고 송도방면으로 꺾어진 뒤 2~3분 달리다 보면 왼쪽에 보인다. 능허대 앞은 제법 넓어 오가기에 좋고 산책 공간으로서는 제격이다. 더구나 공원으로 조성되어 호수가 둘러있맑다. 큰 길가에 있는 입구에서 올라가다 보면 계단이 잘 정비되어 지면이 보이지 않지만 좌우로 눈을 돌려 살펴보면 바위가 적지 않다. 정자에 올라보면 가장 높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사방으로 지각의 모양을 지닌 작은 흙더미가 발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능허대에는 능허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천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한 기념물 제8호인 능허대지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중국으로 가려면 인천항을 통해야 했다. 백제 초기에 중국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사신들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때 능허대에서 배를 탔다. 즉 사신들을 배웅하는 장소였던 셈이다. 바다로 떠나가는 배를 한참동안 바라보아도 고개가 아프지 않을 만큼 적당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로 개발돼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은 작은 정자와 아담한 연못,인공폭포와 분수대 그리고 물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이 있어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정자는 새로 지어진 것이지만 능허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백제가 초기에 중국과 통교할 때 사신들이 배를 띄운 곳으로서 옥련동 해안 속칭 조갯골이다. 현재는 바다로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오해를 하기에 충분하다. 능허대는 백제가 중국 동진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372)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개로왕 21년(475)까지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했던 나루터다. 백제와 동진이 통교했던 당시의 우리 나라 정치형세는 백제가 고구려, 신라와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고, 중국도 남북조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정세 속에서 주로 남조와 통교하고 있었던 백제 사신들은 중국을 왕래할 때 적대관계에 있으면서 북조와 통교하고 있던 고구려를 거쳐 가야하는 육로를 이용하지 못해서 이곳 능허대 밑 한나루를 출발하여 산동반도의 등주, 내주에 이르는 해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송도 쪽에서 청량산 자락이 서북쪽 바다, 즉 현재 채석장이 있는 산 쪽으로 뻗어 반도형 구릉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구릉 끝의 조그만 봉우리가 능허대였다. 그리고 이 구릉 동쪽, 즉 송도역 쪽으로 하나의 조그만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포구가 곧 대진이다. 이 포구 입구에 해당하는 곳에는 “소둑”이라는 능허대에서 뻗은 둑이 있어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 사신들이 바람 때를 기다리던 곳이 능허대라고 하면 배에 오른 곳이 바로 능허대 밑의 대진이다. 그러므로 어느 책에는 사신이 떠난 곳을 능허대라고 하고, 또 어느 책에서는 대진이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이다. 능허대에는 기암전설이 전하고 있다.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백제의 어느 사신이 기녀를 거느리고 이 곳에서 후풍(배 떠날 무렵 순풍을 기다리는 일)하였는데 막상 순풍이 불어 배에 오르던 날 이별의 정을 이기지 못한 기녀가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으므로 후세인들이 그 바위를 기암이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 부천시 쪽에서 구산동을 거쳐 만수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별리현이라 하고 관교동에서 능허대에 이르는 문학산 서편 고개를 삼호현(또는 사모지고개)이라고 한다. 별리현은 백제 서울에서 사신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이 곳에서 이별을 나누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고, 삼호현은 별리현에서의 이별을 아쉬워하여 이곳까지 따라온 가족이나 친지들이 능허대 쪽으로 멀어져 가는 사신을 크게 세 번 외쳐 불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많은 세월이 흐르기는 했지만 아마도 백제 시대에도 이곳은 서해안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즉 동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소래나 인천정도의 물결을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인천항이나 인근의 소래보다 더욱 잔잔한 물결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바다로 뻗어나가는 전형적인 기맥의 흐름을 보여주기는 어렵지만 능허대의 모습은 그같은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오랜 세월 파도에 깍인 바위가 앞을 막은 모습이며 사방으로뻗은 지각의 모습이 선명하다. 일부 자료에는 이 능허대가 섬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1930년대만 하여도 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파도에 입수룡이 파여나갔거나 사람의 발걸음, 혹은 인위적인 공사가 의심된다. 독립된 섬이라 하나, 사유에 지각이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이 평온하고 입수룡에 암석이 있으니 전형적인 돌혈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지며, 입수룡의 돌로 인해 암석입수로 가정할 수 있겠다. 암석입수는 정돌취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강한 기맥의 상징으로 본다. 그 기맥의 흐름을 보여주듯 정자 앞으로 뻗어나간 기맥은 다시 작은 혈판을 결지 하였는데 전순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강한 기맥을 토출시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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