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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무질 묘역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2-20 조회수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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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한확 선생의 부인인 남양부부인의 묘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역사의 한 시대를 살았던 민무질의 묘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산 54-1이다.
덕정사거리에서 불과 3키로를 가지 못해 묵은재 고개를 넘게 된다. 고개를 넘자마자 좌측으로 논이 보이고 골짜기가 보이는데 그 안쪽에 민무질의 묘역이 있다. 즉 양주국군병원에 이르기전에 좌측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논옆으로 들어간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저수지가 나오는데 묵은재 저수지다. 이 저수지 오른쪽 길로 가면 저수지 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민무질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묘역 하단에 자리하고 있어 잘 보인다.
신도비는 축대를 쌓아 호석을 갖춘 민무질 묘 앞에 있다. 비좌와 비신 및 옥개석을 갖추었는데 옥개석의 규모에 비해 비좌가 작고 비신이 길쭉하여 다소 불안정한 느낌이 든다. 비좌는 백색 화강암이지만 검붉게 산화되어 있으며, 비신은 백색 대리석으로 전,후면에 비문이 있는데 전면에 5개의 탄흔이 있는 것 외에는 글자가 뚜렷하고 상태가 양호하다. 옥개석은 백색 운모화강암이다. 한편묘역 입구에는 후손들이 1978년 5월에 現代文으로 비문을 새겨 새로 건립한「興閔公無疾神道碑」가 귀부 위에 얹혀져 있다.
총 3기의 묘역이 있는데 가장 아래는 다른 곳에서 조상의 유골을 모셔와 모신 것으로 보이는 납골묘다. 그리고 위쪽으로 2개의 묘가 있는데 위쪽의 묘가 민무질의 묘로 보인다.
민무질(閔無疾, ?∼1410(태종 10)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제(霽)의 둘째아들이며,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1398년(태조 7) 제1차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으로 책록되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으며, 좌군총제(左軍摠制)·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 등을 역임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7월 형 무구(無咎)와 함께 연루된 옥에 대한 죄목을 이듬해 10월의 교서에 10가지로 열거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협유집권(挾幼執權)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즉, 1402년 왕이 창종(瘡腫)을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몰래 병세를 엿보며 어린 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이들이 왕의 외척이며, 정사·좌명 공신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는데도 이러한 의심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의 성격과 정비(靜妃: 원경왕후)의 태종과의 불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태종의 제1차 선위파동으로 민무질 형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세자 정혼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세자 정혼문제는 정부와 대간의 시비로 발전하여, 1407년 7월 정부와 대간이 개편되어 하륜(河崙)이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6일 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李和) 등이 민무질 등 민씨들을 죄줄 것을 청하여 옥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화 등이 열거한 민무질 형제의 죄는 선위파동 때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기를 은근히 기대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한 점과, 이무(李茂)의 집에 가서 왕에 대한 불평을 토로한 것 등이었다.
옥이 발생한 지 2일후 민무질을 장단(長湍)에 송치하고 19일 후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환수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다시 대구에 유배시켰다. 민제가 죽고 한달이 지난 1408년 10월 그들의 죄를 비난하는 교서를 반포하고 곧 삼척진(三陟鎭)에 옮겨졌다. 그 뒤 이무의 옥으로 제주도에 옮겨지고 다시 조호(趙瑚)의 난언이 드러난 지 2일 만에 성석린(成石璘) 등의 강경한 처단 건의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명하였다.
민씨 형제의 옥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한 사람은 이숙번(李叔蕃)으로, 개국공신인 이숙번 일파가 고려의 구가세족(舊家世族)인 하륜을 중심으로 한 일파를 제거하려는 정치파동 속에서 민씨 형제의 옥이 일어났고, 이 옥은 또한 외척제거라는 점에서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민무질의 묘는 비교적 수수하다. 기맥의 힘은 왕성하지 않고 약간의 노쇠한 용맥이 지니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입수룡에서 당판에 들어 그 힘을 모으고 있다. 상단의 묘역이 비대칭적으로 보여 편산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으나 좌선의 넓은 것은 이미 당판을 이루기 전에 지각이 뻗어나온 탓이다. 따라서 묘역이 이루어진 당판은 좌우의 균형이 맞아 유혈을 이루었다.
물은 재산으로 본다. 묵은재 저수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묘역이 조성되던 시기부터 작게나마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저수지는 아니라 해도 당시부터 논이 있었다면 이는 재산으로 본다. 흔히 수국(水局)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재산이 많은 명당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저수지가 있던 논이 예전부터 있었던 이 곳은 아마도 재산이 많은 명당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멀리 안산을 바라보면 마치 원도 아니고 땅에 펼쳐진 것도 아닌 듯한 산자락이 보인다. 이는 전형적인 아미사이다. 아미사는 귀인이 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미인의 눈썹같은 형태를 지닌 산을 가리킨다. 민무질의 묘역의 영향을 받아 귀인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름다운 사격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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