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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평도호부청사와 욕은지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2-27 조회수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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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부평도호부 청사(富平都護府 廳舍)는 부평향교와 불과 1킬로미터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청사가 자리한 계양구 계산동 943번지는 부평초등학교 운동장이다. 운동장으로 들어가면 측면으로 오래된 건물을 볼 수 있다.
경인고속도로 부평IC에서 계양 방면으로 직진하다가 계산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계산1동사무소에서 50M정도 가면 부평초등학교가 나온다.
인천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간다면 부평향교와 달리 계산역에 내린다. 계산1동사무소 방면 출구로 나와 계산1동사무소에서 50M 정도 가면 부평초등학교가 나오며 그 안에 부평도호부청사, 욕은지, 어사대, 은행나무가 있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대단히 큰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두그루의 은행나무는 각기 교실 앞과 청사의 건물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큰 나무야말로 과거 이곳이 어떠한 곳이었는지 보여주는 듯 하다. 그리고 교문을 들어서 우측을 바라보면 울타리를 따라 각종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접근하면 왜소해 보이는 작은 건물 한 채와 언뜻 보아서는 양반가의 사랑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작고 아담한 연못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욕은지다.
청사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려 의종 4년(1150) 안남도호부가,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13년(1413) 부평도호부가 각각 설치되었다. .
기록을 살펴보면 부평도호부가 어느정도의 규모였는지를 보여준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부평도호부 내에는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 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청사 규모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것으로 이는 부평이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온 웅부(雄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는 부평도호부의 규모나 그 위세를 예측하거나 추측하기 어렵다. 과거는 어떠햇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겨우 한동의 건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건물은 동헌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건물은 당초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ㅡ자형 건물로 변형되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도리집이다. 따라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은 풍수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 자리에 보존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청사 앞에는 연못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느데, 욕은지이다. 이 욕은지를 둘러싼 철책 옆으로 작은 돌비석이 있다. 이 돌에는 [어사대(御史臺)]라고 쓰여져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어사대와 다를 바가 없다.
어사대는 욕은지 동쪽 1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큰 돌로 대를 만들고 중앙에 『어사대 광서정해 중수 (御史臺 光緖丁亥 重修)』라고 새긴 돌이 놓여 있다. 이 곳도 인근의 욕은지와 같이 정조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정조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과 안산을 거쳐 수원 화산의 현륭원(지금의 융릉 : 사도세자 의 능)을 전배하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활을 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정조는 활쏘기를 즐겨하여 수원 행궁(임금이 거동할 때 묵었던 별궁)에 들를 때마다 활쏘기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활을 쏘게 하였다고 한다. 당초 이 곳 어사대 후문에는 정자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고종 24년 (1887) 중수하였다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이 어사대가 있는 곳이 욕은지다. 부평초등학교 교정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욕은지는 장대석을 쌓아 가로 18cm, 세로 16cm 규모로 축조한 장방형의 연못이다. 연못 내에는 돌로 쌓은 작은 동산을 만들고 각종 화초를 심었으며 석교가 놓여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곳은 인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하지만 인조는 부평에 거동한 적이 없어 실제로는 정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생부인 장헌(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1년에 한 차례씩 전배하였다. 특히 21년(1789)에는 먼저 김포 장릉을 전배하고 부평, 안산을 거쳐 현륭원(사도세자의 원)을 참배하였다. 이 때 정조는 부평에 주정(晝停 : 낮에 머뭄)하여 부사를 인견하며 활을 쏘고 이 곳 욕은지에서 손을 씻거나 관람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못은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우리 조상의 생활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정원이나 장원의 안쪽에 자리한 연못이나 연지는 사람의 건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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