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즙신도비(沈楫神道碑). 인천시 서구 공촌동 산 8번지에 있다. 신도비가 있는 곳은 대부분 묘역이 있기 마련이다. 인천에서 서구는 조금 동떨어진 분위기다. 부평이나 남동구와 달리 조금은 덜 번화한 것 같기도 하다. 육군 103보병여단 사격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우묵한 분지가 있고 그 안에 묘역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묘역 하단부에 있는 4기의 신도비다. 한눈에 보아도 모두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이중 심즙의 신도비는 정면에서 보아 우측 두 번째 신도비이다. 묘역에 들어서서 놀란 것은 묘역 그 자체다. 묘역은 산의 비탈을 깍아 계단식으로 만들고 적게는 6기에서 많게는 10여기까지 일렬횡대로 나란히 모셨는데, 이는 풍수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장법이다. 기는 능선을 따라 흐르고 그 넓이는 불과 한자에 불과하다. 그런 연유로 묘역을 조성할 때는 일렬로 조성하는 것이다. 좌우로 벌려 조성하는 것은 우리 고유의 풍습이나 풍수법이 아니며 편리성을 추구한 결과이다. 기맥을 타지 못한 묘의 자손들에게는 좋은 동기감응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 가장 위쪽에는 몇 기의 묘가 있다. 정면에서 보아 왼쪽 두 번째가 심즙의 묘역으로 보인다. 심즙(1569∼1644)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자순(字順)이며 호는 남애(南崖),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28때인 1597년(선조 3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형조, 공조,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특히 이괄의 난 때는 인조가 공주로 이어(왕이 처소를 옮김)할 때 호종(왕을 모시고 따라감)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심즙의 묘는 본래 시흥에 있었으나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현 위치인 서구 공촌동으로 이장하였으며 그때 신도비도 함께 이곳에 옮겼다고 한다. 신도비는 높이 1.9m, 너비 0.85m, 폭 0.53m 규모이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홍봉조가 썼으며 유척기가 새겼다. 묘역을 살펴보면 입수룡이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넓게 퍼져있으며 그 용맥도 확연하지 않다. 이와같은 용맥은 용맥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용맥은 지현자로 움직이거나 굴곡을 하여야 한다. 넓게 펼쳐진 묘역이 보여주듯 혈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교쇄의 문제점도 있으나 이미 혈판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어떤 사격도 의미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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