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묘를 찾는 것은 문화재로 지정된 묘를 찾는 것보다는 수십배나 어렵다. 인천에는 왕족과 관련된 묘가 많지 않다. 왕릉을 조영함에 도성 100리를 국한하였다. 그러나 왕을 제외한 왕족은 그 거리를 그다지 따지지 않았는데 주로 경기도 일원에 그 일족의 무덤이 많다. 거리로 따져도 사대문에서겨우 100리에 불과한 인천에는 왕실의 무덤 찾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숙의문씨묘는 왕의 후궁이다. 인천광역시 서구 심곡동 35-1번지 인천심곡초등학교 뒷산에 있다.학교 옆의 철계단으로 난 통로를 차단하고 있었고 학교에서 이어지는 길도 차단하고 있어 접근이 불편하다. 주변에는 전주이씨의 선영으로 묘들이 에워싸고 있다. 아니, 숙의문씨의 묘는 한 옆으로 치우쳐져 있다. 만약 안내간판이 없다면 찾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숙의 문씨의 묘 주위는 여러기의 묘가 있고 철망을 쳐서 구획을 나누었으나 진정으로 왕실의 무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규모가 작다. 그 면적도 작아 마치 민초의 묘역보다 못하다. 숙의 문씨(1426-1508)는 문종의 후궁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문숙의는 남평의 문씨 문중에서 문민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세종조에 판중추원사를 지낸 문효종이고, 그의 증조부는 고려 공민왕 때 순평군으로 봉해진 문달한이다. 숙의 문씨는 세종 8년에 태어나 17세 되던 세종 24년(1442)에 문종 후궁으로 선입되었는데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조초에 소용으로 승차하였고, 명종 즉위 초에 다시 숙의로 승차하였으며 중종 3년(1508)에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숙의 문씨는 평생 인후를 마음의 근본으로 삼고 공검으로 몸을 다스리는데 힘썼으므로 능히 인자의 수를 다 할 수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후사가 없었다. 중종 3년 9월 26일에 이 곳 부평 가원을 택하여 장사지냈다. 이상이 안내간판에 쓰여진 내용이다. 문숙의 묘는 봉분이 퇴락하고 묘비조차 땅에 파묻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1947년에 류희진씨가 탐사 끝에 묘와 묘비를 찾아내어 봉분을 모으고 비를 다시 세웠는데 비에는 “문종 후궁 숙의문씨지묘”라고 쓰여 있다. 이때 백자에 쓴 문숙의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현재 인천 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숙의묘는 그 후 1974년에 다시 묘역을 확장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숙의의 묘는 일반적으로 사대부의 묘역만 못하다. 아마도 애초에는 능원의 형식으로 조영하였으나 돌보는 이가 없어 쇠락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묘역이 쇠락한 것처럼 묘역의 입지도 좋다고 할 수 없다. 묘역 조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용혈사수이다. 즉 용맥이 살아있어야 하고 혈을 맺혀야 하는 것이다. 그 후에야 사격을 찾고 물을 찾는 것인데 이미 묘역은 용맥이 흩어지고 그 맥이 약하며 뒤가 찢어지고 흩어진 듯 하니 그 기초가 부실하여 혈을 결지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맥은 용의 중심을 타고 흐르는 것인데 묘역은 용의 우측으로 지나치게 몰려 있다. 앞을 눈여겨 보면 안산이 마치 귀인의 허리띠를 연상하게 하는 모양인데 그 모양을 일부에서는 [풍취라대]라고 부른다. 아마도 그런 모양을 보고 조영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혈판이 없으면 100가지의 사격이 무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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