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혹은 이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지만 계양구 작전2동 산2번지에는 영신군의 무덤이 있고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신공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경인고속도로 부평IC에서 계양방면으로 직진하다가 경인교대 조금 못가서 계산예술극장쪽으로 좌회전하여 200m 가면 리이의 묘가 나온다. 근처에는 작전역이 있고 경인교대역과도 가까운 곳이다. 인천지하철 1호선을 타고 경인교대역에서 내린 후 경인교대방면 출구로 나와 계산예술극장쪽으로 좌회전하여 200m 가면 영신군리이의 묘가 나온다. 물론 작전역에서 내려도 불과 10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연신공원이라 불리는 이 묘역은 아파트로 사방팔방이 둘러싸인 모습이다. 공원은 잔디가 잘 자랐는데 중앙에 이십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묘군이 있다. 이중 가장 위쪽에 자리한 묘역, 즉 여말선초의 비석 모양이 있는 묘가 리이의 묘다. 영신군 리이(李怡)는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의성군 채(采)의 여섯째 아들이다. 자는 화보(和甫)로 단종 2년(1454)에 출생하여 정의대부(正義大夫) 영신군(永新君)에 봉해졌고 부평에 낙향하여 기거하다가 중종 21년(1526)에 사망하였다. 현재, 본역에는 영신군 부부의 묘를 비롯하여 그 자손 14명의 묘가 있다. 리이의 묘는 일반 사대부의 묘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왕자의 공주, 혹은 옹주의 묘역이 그리 뛰어난 경우는 보지 못하였다.이 묘역에서 유념할 것은 이 묘역이 어떤 이유로 사면에 묘역을 조성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조상들은 사면에 묘역을 조성하는 경우는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사실 유명한 묘역, 명당으로 이름을 얻은 묘역 대부분은 산의 능선에 조성되었다. 만약 능선이 아니라 측면으로 묘역을 조영했다면 그 가능성은 두 가지다. 그 첫 번째는 풍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풍수에 정통하기 때문이다. 즉, 기맥이 능선의 측면으로 흐르는 것은 와혈(窩穴)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와혈을 찾아 정확하게 심혈을 할 수 있다면 이미 풍수는 다 배운 것이나 다름없다. 리이의 묘역을 살펴보면 울타리 뒤쪽으로 능선의 흔적이 있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밟아 그 형태가 변하고 펑퍼짐한 용맥이 시야를 어지럽게 하지만 분명 능선은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리이 일가의 묘역은 능선을 벗어나 측면에 조성되어있다. 능선과 기맥,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면 계양산에서 일어난 기맥이 능선을 따라 이곳에 이르렀지만 하부는 건물로 인해 그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용이 지나치게 넓고 상부의 지각이 지나치게 넓게 흩어진 모습이다. 그럼에도 묘역을 조성한 것은 아마도 능선 뒤로 퍼져나간 지각 때문으로 보인다. 와혈의 필요충분조건이 있다. 필요조건은 반드시 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충분조건은 낙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귀성이 있다면 이는 와혈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다. 리이의 일가가 모셔진 이 음택이 명당의 조건을 구비하였는지를 확인하고자 한자면 와혈의 필요충분조건을 살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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