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상일나들목 부근의 하남 방향에 이십여개 이상의 묘가 몰려있다. 묘역의 상단부에는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장방형의 돌이 사각의 형태를 만들어 봉분을 올린 묘가 있다. 이 묘의 주인이 바로 임열(任說) : 1510년(중종 5) ∼ 1591년(선조 24)이다. 묘역에 도착해 보면 마치 치마를 펼친 듯 넉넉해 보이는 대지에 적지 않은 묘들이 있다. 고속도로 변이라서 그런지 묘역은 잘 단장되어 있으며 위쪽에 자리한 3기의 묘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중 가장 위쪽, 묘의 배치로 보아서 이곳의 가장 어른의 묘는 임열의 묘다. 임열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군우(君遇), 호는 죽애(竹崖)이다. 교수 임장손(任長孫)의 증손이고, 성균관 생원 임제(任濟)의 손자이며, 남부참봉(南部參奉) 임명필(任明弼)의 아들, 첨정 윤훤(尹萱)의 외손, 이한(李漢)의 사위이다. 그는 문학과 덕망이 높은 원로로 네 명의 임금을 섬기면서 벼슬하였다. 1531년(중종 26)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3년(중종 2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어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박사를 거쳐 1535년(중종 30) 11월 부수찬이 되었으며, 1536년(중종 31) 홍문관 수찬으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다시 1538년(중종 33) 이조좌랑으로 영시(英試)에 차석으로 합격했다. 불과 10년 미만에 세번씩 대과에 급제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문학에 명망이 높은 까닭에 말미를 얻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39년(중종 34) 7월 홍문관 교리·시독관, 1542년(중종 37) 3월 부교리, 다음달 사헌부 집의를 거쳐 1543년(중종 38) 9월 홍문관 전한, 다음달 10월에는 홍문관 직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8월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같은 달 다시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548년(명종 3)에는 천추사로 명에 다녀왔고, 1549년(명종 4) 8월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되었다가, 다음해 7월 다시 예조참의에 제수되었다. 1551년(명종 6) 2월 병조참의가 되었고 1553년(명종 8) 6월에는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대사성·형조참의를 거쳐 1557년(명종 12) 10월 공조참판이 되었다. 1558년(명종 13) 9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제수되었고, 11월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로, 1560년(명종 15) 5월 병조참판, 동년 8월 한성부 우윤, 1562년(명종 17) 2월 한성부 좌윤, 같은해 8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다고 하여 탄핵하였다. 그러나 1564년(명종 19) 9월 다시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다. 1567년(명종 22) 5월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1572년(선조 5) 12월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물품을 준비하지 못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특진관이 되었고, 한성부 판윤에 이르렀으나 계속해서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지중추부사에 이른 후, 1591년(선조 24) 5월 죽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알려져 관직에 있으면서 근면 성실로 치적이 있었다. 60년 가까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족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신진세력으로부터 검소하지 못하다는 탄핵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알아보는데 뛰어나 관학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조정에서도 인재를 알아보는데 선견지명이 있는데다가 남에게 양보를 잘한다 하여 여러 차례 시험관이 되었다고 한다. 율곡(栗谷) 이이가 전형관으로 있을 때 늘 “임모(任某)는 무슨 연유로 오랫동안 등용하지 못하는가? 그가 바로 정경(正卿)을 보필할 적임자이지 않더냐?”하고, 개탄하여 말했는데, 이 때문에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공조판서의 탄핵으로 제수되지 못하였다. 문장에 조감(藻鑑)이 있고 고시(考試)에 남다른 안목이 있어서, 그가 발탁한 사람은 모두 명인(名人)이었거나 혹은 뒷날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2남 4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숭로(崇老)로 찰방(察訪)을 지냈고, 둘째 아들은 영로(榮老)로 문과 장원에 합격하고 또 중시에 뽑혀 관직이 종부시 정(正)에 이르렀다. 첫째 딸은 부사 남궁제(南宮悌)에게, 둘째 딸은 현감 이준(李浚)에게, 셋째 딸은 군수 신홍점(申鴻漸)에게, 넷째 딸은 종실인 흥령군(興寧君) 이수전(李秀殺)에게 시집갔다. 유집(遺集)으로 10여 권을 남겼으나, 전란 때 분실하여 알 수 없다. 묘소는 하남시 초일동(草一洞)에 있으며, 1753년(영조 29) 4월 문정(文靖)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임열의 묘는 보기드믈게 넓은 지역이다. 예로부터 용혈사수라 하여 음택을 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용이 굳건하고 강건해야 한다. 육안으로 살펴 강한 기맥이야 말로 강한 혈판을 형성한다. 임열의 인간됨은 역사의 기록이 말해주듯 많은 사람들이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묘역에 이르는 용은 그다지 감탄할 것이 없는 것 같다. 넓게 퍼진 용맥은 기맥이 약하고 노년기 산을 대표한다. 노년기 산으로 대별되는 약룡은 혈을 결지하기 어려우며 결지한다고 하더라고 그 혈판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인근을 살펴보면 곡장 뒤로도 적지 않은 묘역이 있는데 한결같이 노년기 형질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용맥은 혈판을 결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같이 약한 기맥에서 혈이 결지된다 해도 그 능력은 매우 떨어질 것이고 대부분은 넓게 퍼져 혈상을 유지하지 못한다. 혈상이 크면 그 높이도 있어야 한다. 높기만 하고 좁은 혈상은 독불장군 격이고 넓으나 지나치게 낮은 혈상은 설기라 할 수 있다. 임열의 묘가 자리한 곳은 혈상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높이도 없어 넓게 퍼진 형상이다. 치마를 펼쳐놓은 형상은 혈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최상부의 임열 묘는 물론이고 그 아래 2기의 묘까지는 묘제를 갖추고 기맥은 타고 있다다. 모두 장대석으로 묘역을 조성하고 있어 그 모습이 남다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조영된 것으로 보이는 묘들은 난립한 상태고 기맥을 피하고 있으므로 묘제로서는 적당하다고 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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