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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전순의 바위가 돋보이는 창원군 묘역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2-28 조회수 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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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덕풍동 한솔 아파트 인근 100번대 동번호가 있는 아파트 옆에 있다.
먼저 보이는 것은 커다란 신도비다. 그러나 이 신도비는 창원군의 신도비가 아니고 희령군(熙寧君)의 신도비다. 이 신도비 뒤에 단이 있다. 이 부근이 모두 전주이씨의 종산이므로 여기저기 묘역이 있다.
희령군은 조선전기의 종실로 이름은 타(肇)이다. 어머니는 태종의 후궁 최씨(崔氏)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질병으로 하루도 조정에 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평소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러웠으며, 정조(正朝)·동지(冬至) 때 가정(家庭)에 위패를 설치하고 예를 행하였다. 1433년(세종 15) 정월 세종은 이타를 희령군(熙寧君)으로 봉하였고, 중한 병을 가엾게 여겨 특별히 과전(科田) 1백 결(結)을 주었다. 1452년(단종 즉위) 단종이 호조(戶曹)에 명령을 내려 윤처공(尹處恭)의 집을 주었다. 1465년(세조 11) 7월에 죽었는데, 그의 졸기에 따르면, “이정(夷靖)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마음이 편안하며 편안함을 좋아하는 것을 이(夷)라 하고, 부드럽고 곧으며 편안히 살다 죽은 것을 정(靖)이라”한다 하였다. 그의 자식으로 아들이 셋 있었는데, 맏아들 이감(李堪)은 화성군(花城君)이고, 둘째 아들 이배(李培)는 영원정(領原正)으로 먼저 죽었다. 셋째 아들 이게는 곡강령(曲江令)이다.
이 묘역에는 3단으로 나뉘어 묘역이 조성되었다. 이중 가장 아래쪽의 묘가 창원군의 묘다. 묘역 하단에는 검은 바위가 박혀 있다.
창원군(昌原君1457-1484(세조3-성종15))은 경창군의 아들이다. 창녕군을 알고자 하면 경창군이 누구인지 아는 편이 더욱 빠르다.
경창군은 선조대왕의 9남으로 1596년(선조 29)에 태어나 1644년(인조 22)에 별세했다. 어머니는 인동현감 증 이조참판 여겸(汝謙)의 딸로 정빈(貞嬪) 남양홍씨다. 공은 항상 근신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광해군 때에 해를 입지 않았으며 인조반정 이후 종부시 도제조와 종친부 유사 당상에 있으면서 전력을 다해 임하였으며 1662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많은 은총을 입었다.
공은 군부인 창녕조씨와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창원군(昌原君), 차남 양녕군(陽寧君)은 임해군(臨海君)에게 출계하였으나 둘 다 조졸하였고, 평운군(平雲君)은 신성군(信城君)에게 출계하였고 막내가 창성군(昌城君)이다. 딸들은 직장(直長) 이후걸(李後傑), 진사류연(柳?)과 판관 심약하(沈若河)에게 출가하였다. 이외의 배위와의 사이에서 창임군(昌臨君)과 창흥군(昌興君)을 두었다.
이 묘의 주인이며 경창군의 장남인 창원군은 현감 한사덕(韓師德)의 딸과 혼인하여 3남을 두니 청평군(淸平君), 청흥정(淸興正), 청풍군(淸豊君)이다. 부근에서도 보기 드믈게 좋은 형상을 지닌 묘다.
물론 묘 하나를 두고 평가할 것은 아니다. 4대 선조를 모두 살펴야 하지만 창녕군의 묘는 뛰어난 바가 있다. 그러나 제자리라고 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다른 하나의 봉분을 더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맥을 따라 3단으로 나뉘어 차례로 묘역을 조성하였는데 상부 2기의 묘는 용맥상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아래에 자리한 창녕군의 묘는 전순과 입수가 완연하다. 즉 형상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순의 형태로 보아도 산진처에 응결되어 기맥을 보여주듯 자연적으로 돌출된 바위가 전순의 ㄲㅌ부분을 차단하고 있는 유혈이다.
혈심을 찾는 일은 음택의 꽃이다. 심혈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창녕군의 묘는 좌선이다. 즉 좌측에 굴곡을 두고 우측으로 휘어진 모양이라 좌향은 물론이고 그 기맥과 혈심을 찾는 노력도 이에 준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묘는 우측으로 약간 치우쳐져 있어 혈심을 살짝 벗어나 있다. 물론 태극훈 안에는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심혈에는 실패했다고 하겠다. 우측의 공간이 다른 봉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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