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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차라리 아름다워 보이는 선성군 묘역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6-12-28 조회수 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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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덕풍동 덕풍골 마지막 골짜기 한솔 아파트 끝에는 전주이씨의 선산이 둘러쳐져 있고 그중에서 가장 밝은 곳에 선성군 묘역이 있다. 일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개 종종의 묘역으로는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나 선성군 묘역과 석물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사방으로 철망이 쳐져 있어 출입은 제한적이다. 아파트가 가까이 둘러싸고 있고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견 이해가 가지만 공원화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선성군은 왕족이다.
선성군 신도비(宣城君神道碑)를 해석하는 것으로 그를 알아본다.

<번역문>
선성군 증영정종경 사시양정 이공 신도비명
증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 행중의대부 선성군 사시양정 이공 신도비명 병서

광릉의 남한성은 백제의 옛 도읍지다. 거기에서 동북쪽으로 10리의 거리에 덕봉이 있으며 덕봉의 남쪽 남향의 등성이는 우리 선조이신 선성군 양정공의 유택이다. 공은 후릉의 왕자이시다. 거룩하신 후릉께서는 임금의 자리를 팽개치고 풍덕의 강가로 물러나셨으니 그 지극하신 덕은 백성들이 형용할 만한 적당한 말이 없다. 공은 그 교훈을 잘 이어받아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끼니 반찬을 유념해 살펴보시는 여가에 담박하고 조용한 마음을 스스로 지키고 권세와 존귀함을 싫어해 피하여 하간과 동평의 덕이 있으셨는데, 의친의 규례에 따라 정윤에 봉해지셨다. 당시에 왕자의 집들이 다 사병을 두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실로 화의 근원이 되었는데 공께서는 깊이 스스로 자취를 감추고 향기로운 나무와 떨어지는 꽃잎 속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시니 세종께서 학문을 힘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서의 배천에 귀양을 보내셨다가 얼마후 상께서는 그 본의를 살펴 알고 불러와 관직을 도로 주셨다. 단종 2년 갑술 3월에 중의대부에 오르고 선성군에 봉해지셨으며 그해 5월에 공께서는 종친·의빈 문무백관과 함께 경회루에서 진풍연을 열어 태평시대를 빛내고 장식하시어 당시의 성대한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뒤로는 국가가 다사다난하였기 때문에 공은 더욱 스스로 뒤로 물러나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한가롭게 사시다가 좋은 명예를 보전하고 일생을 마치셨다.
고종 임신년 3월에 종친부에 하교하시기를 “정종의 여러 왕자에 대한 봉작을 논의하여 올바르게 하라”하니 회계하기를 “정종의 왕자 가운데 다섯 정은 아직 군을 봉하지 못하였고 아홉 군은 이미 봉작은 하였으나 벼슬의 계급이 들쭉날쭉하여 모두 미안합니다. 군을 봉하지 못한 이는 계급이 없는 그대로 군을 봉하여 이미 봉한 제군과 아울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푸는 것으로 해조에 본부하시는 것이 종친의 정의를 독실히 하는 뜻에 합당할 듯합니다”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그대로 윤허한다. 시망은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거행하라”하였다. 그 후 5일이 지나 공에게 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으로 비지를 내리고 아울러 시호를 양정이라 내리셨다. 시법을 살펴보건대 “온화하고 선량하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양이라 하고 너그럽고 화락하며 좋은 이름을 간직하고 마치는 것을 정이라 한다”하였다. 아 조정에서 조상을 높이고 은혜를 갚는 예가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공의 휘는 무생이며 가계는 왕족으로 윗대는 『선원보』에 실려있다. 선비 충주 지씨는 고려 찬성사 휘 윤의 따님으로 초방에서 덕을 길러 어질다는 이름이 크게 났었으며 5남 1녀를 낳으셨는데 공은 그중 둘째이시다. 공은 대체로 세번 장가를 드렸는데 오천군 부인 정씨는 참의 휘 종성의 따님으로 포은 선생의 손녀이시고, 안강군 부인 김씨는 상호군 휘 중약의 따님이시고, 평산군 부인 한씨는 평산백 휘 후저의 후손이시다. 정부인과 김부인은 공의 묘소 왼편에 부장하였고 한부인은 섬돌 아래에 부장하였다. 공의 후손이 면면히 5백여 년간을 이어오는 동안에 고관대작이 당시에 혁혁하게 빛나고 문장 업적이 후세의 역사에 전해오며 자손의 수효도 많이 늘어나 팔도에 깔려 있는데, 내외의 자손을 합치면 수천명에 이르니 이는 다 공께서 인덕을 쌓은 것에 대한 결과이다.
아! 연대가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문헌은 산일되어 숨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고증할 곳이 없으며 국사에서 채취한 것은 겨우 천백 분의 일일 뿐이니 서글픈 마음 금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자손이 쌀밥을 먹고 비단 옷을 입는 것은 모두가 선조께서 끼치신 음덕이니 자나깨나 사모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묘도의 석물 등 예모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걱정하고 탄식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15세손 승화가 성심을 다하여 일을 경영하고 두화는 거금을 출연하여 스스로 비역을 부담하는 등, 여러 친족이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능히 수백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한 일을 거행하였으니 이는 하늘에 계시는 선조의 신령이 뒤에서 도와주신 것이라고 본다. 때는 성쇠가 있고 천운은 명암이 있는 법이다. 혹시 또한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성조께서 왕업을 일으키시어 크게 하늘의 운을 한 몸에 받아
많은 아들 손자 탄생하시어 솟구치는 용이요 닫는 범일레.
빛나는 붉은 슬갑 몸에 걸치어 천하로 가정 이룰 군왕의 신분
극도의 부귀영화 지니고 보니 능히 법도 지킨 이 적었었는데.
공께서는 삼가고 또 삼가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절개
길이 좋은 이름 보존하시니 이미 현명하시고 슬기로웠네.
행검은 온화하고 선량했으며 용심은 관대하고 화락하시니
행복이 이르러와 편안하였고 남들이 신임하여 우러렀다네.
백대토록 자손이 번창도 하여 그 수효가 천억을 헤아릴레라.
홍문관의 청망을 누리시었고 영의정의 미덕을 지니셨는데
오백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니 아스라이 그 모습 멀어졌어라.
드높은 저 덕봉을 우러러보니 공의 의복 고이고이 묻힌 곳인데
오랫동안 비석이 있지 않아서 아름다운 그 덕이 아니 빛났네.
드디어 미처 못한 일을 거행해 여기에 좋은 빗돌 세웠사오니
신께서 아무쪼록 보우하시어 깨지고 마멸되지 않게 하소서.
16세손 가선대부 전 종정원경 명상이 글을 지음.
숭록대부 전 판돈령원사 해평 윤용구가 글을 씀.
보국숭록대부 전 판돈령원사 여흥 민병석은 전액을 씀.
정축(1937) 12월 일 세우다.

일대는 무수한 묘역이 있고 대부분 전주이씨의 후손들 묘역이다. 특징적인 것은 이 묘역들이 자리한 곳인데, 대부분 산의 정상이나 산의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로 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음택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즉 기는 능선을 따라 흐르는 것으로 묘역을 조성하는 기본은 능선이다. 때로는 측면에 혈판이 붙기도 한다.
일대의 묘역은 하나같이 능선상에 있다. 모든 묘역이 음택의 정형을 지닌 것은 아니다. 묘역을 조성함에 쌍봉이나 단봉의 차이도 있고 그 위치적 차이에 따라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 능선에 자리하고 있어 장승생기(葬乘生氣)의 이치를 충족시키고 있으며 단봉일 경우에는 산진처에 자리하고 있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된 선성군의 묘와 묘하의 묘역군은 전형성을 보이는데 역시 최상부에 자리한 선성군의 묘는 전형성을 지닌 유혈이다.
앞쪽의 수많은 아파트들이 앞을 차단하고 있어 조금은 답답하다. 과거와 달리 과학의 발달이 가져다주는 개발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명당은 개발을 피해가는 곳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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