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유형문화재 12호로 지정된 청권사는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묘와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방배동 191-1에 있다. 서울시는 1972년 [청권사부묘소]라는 이름으로 청권사와 효령대군 묘역을 지방유형문화 재 제12호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인 자료에는 청권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방배역에서 서초 방향으로 바라보면 좌측 담장 안으로 흰색 2층 건물이 보이고 그 내부에 묘역이 있다. 효령대군의 묘역 아래에는 사당이 있고 7대손과 8대손의 묘역이 전순 아래 있다. 측면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매우 큰 묘역을 볼 수 있다. 묘역은 왕릉을 보는 듯 넓으나 봉분은 그다지 크지 않다. 효령대군과 그의 부인 묘이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태종 12년에 효령대군에 봉해졌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던 효령대군은 독서를 즐겼으며, 특히 불교에 독실하여 세조 10년(1466)에는 원각사 창건 때, 조성도감제조가 되어 감독을 맡기도 했다. 한편 원각정을 국역, 간행하기도 했다. 효령대군은 1396년(태조5) 태종대왕과 원경왕후의 둘째 왕자로 태어았으며, 휘(諱)는 보(補),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온화문명하고 효제충신의 자질를 갖추었고,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2세에 효령군으로 봉군되고, 좌찬성 정역의 딸인 해주정씨와 혼인하였으며, 17세에 효령대군으로 진봉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이신 태종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아우인 충녕대군에게 성덕이 있음을 알고 앙위를 사양하였다. 조선왕조 개국 초기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에 입각한 왕권확립과 종교변혁기에 동요하는 백성들의 민심이반을 총화로 이끌기 위해 유불 조화론을 주창하였고, 나라의 안정과 왕정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며, 불서의 국역과 사찰의 증개축 및 법기 조성 등의 불사와 보국안민과태평성대를 위하는 위업에 전념하였다. 특히, 그는 백성들의 자치규범으로 ‘향헌(鄕憲)56조’를 제정하여 대민강론으로 백성들의 윤리 도덕과 의식교화에 헌신하였다. 또, 효에 대한 이론정립과 권계하실 목적으로 ‘부모은중장 수태골경합부’를 사경하였다. 대군은 위민정신의 실천자이며 진취정신의 선구자로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근본적인 역할을 다하였며,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존경과 예우를 받으시며 살다가, 1486년(성종17년) 5월 11일 91세를 일기로 하세(下世)하였다. 그는 문화창다에도기여한 바가 크다. 국보2호인 ‘탑골공원의 10층석탑’의 건립과 보물2호인 ‘보신각종’의 주조를 직접 감독하였다. 그리고 옛 흥복사 터에 원각사를 짓게 되자 그 역사를 주관하고, 계정혜(戒定慧)에 바탕을 둔 불법의 수련을 독실히 하여 관악산 연주암, 월출산 무위사, 만덕산 백련사, 양주회암사 등의 많은 사찰을 중건하거나 중수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연화경(蓮華經),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등의 번역을 비롯하여 많은 호국불사를 주장하고 불교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대군은 왕자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공명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충(忠), 효(孝), 덕(德), 우애(友愛), 겸손(謙遜), 검소(儉素), 조화(調和), 화목(和睦)등을 몸소 실천하며 천수(天壽)를 누렸다. 태조로부터 9대 성종대왕에 이르기까지 아홉 임금의 조정을 보필하면서 명예와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고 왕실의 번영과 나라발전에 공헌과 충성을 한 것으로 추앙받는다. 1737년 영조대왕은 묘하에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며, 1789년 정조대왕께 서는 사당의 현판을 하사하였다. 1865년(고종2년) 종묘(宗廟) 공신당(功臣堂)의 세종대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諡號)는 정효(靖孝)공이다. 정효의 뜻은 너그럽기를 즐기며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하고, 지혜롭게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한 것을 효(孝)라 한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며 여섯째 아들 원천군(原川君)은 아우이신 성녕대군에게 출계시켰다. 손자 33인과 증손자 109인을 두었고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禮葬)되었다. 또한 배위 예성부부인 해주정씨는 1394년 태어나 14세에 대군의 배필이 되었다. 대군을 정성껏 내조하시다가 1470년(성종1) 77세를 일기로 하세(下世)하였다. 일찍이 효령대군은 형인 양녕대군과 함께 아우인 세종에게 손양으로 처신하여 청도함에 맞았고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스스로 폐한 것은 권도함에 맞음이니 이러한 행동을 칭송하는 뜻에서 “청권”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묘역에 올라보면 놀라울 정도로 넓은 당판이 드러난다. 입수에 올라 살펴보면 묘역 앞에서 바라보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전순이 아름답고 혈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다. 혈이란 고유의 혈상을 지닌다. 효령대군의 묘역처럼 산진처에 혈상이 맺히는 경우는 전형적인 유혈이라 할 수 있다. 유혈은 유혈 고유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니, 이 형상은 달걀을 반으로 갈라 바닥에 눕혀놓은 모양이다. 주의할 것은 달걀의 모습이 좌우로 펼쳐진 모양이 아닌 종(從)으로의 모양인 것이다. 갸름한형상인데 이와 같은 전형적인 혈상이 나와야만 되는 이유는 양선익의 좌우를 합쳐 30도 미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선익이 30도를 넘으면 비혈이는 것이 풍수의 법칙이다. 이와같은 이치를 무시하고 벌어지는 논쟁이 바로 남양주시 조안면에 자리한 [한확]의 묘다. 이 묘는 오래도록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주변사격과 득구, 파구로 인하여 이기풍수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천하의 명당으로 주장하고 있다. 반대의 의견도 적지 않다. 그 의견의 가장 핵심은 당판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묘역은 산자락을 펼친 것이며 이기를 주장하는 풍수사들이 주장하는 혈판이라는 것이 좌우로 벌려진 모양이라는 것이다. 풍수는 기본을 넘어서는 것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기본은 기본에 충실할 때 그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효령대군의 묘역도 당판이 좌우로 지나치게 넓은 모양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확 선생의 묘와는 달리 입수룡이 확연하고 입수의 형상도 살아있으며 당판도 돌출되어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좌우로 제사를 지낼 공간으로 넓힌 것으로 보인다. 즉, 애초의 묘역은 전형적인 유혈의 혈상을 지닌 명당이나 인작으로 주위를 넓혀 당판이 넓어졌다. 아쉬운 것은 묘역 아래의 7대손과 8대손의 묘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조상묘 주위는 망지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이와 같은 경우를 일컷는 말이다. 즉 조상이 혈에 묘셔진 경우에 그 주변에 묘를 조성하면 전순에 묘를 조성할 경우가 많다는 이치다. 전순에 묘를 조성하는 것은 다른 곳에 묘를 조성하는 것만 못하다. 혈상이 높고 독립적인 도드라짐이 강할수록 더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효령대군 묘 가까운 곳에 잉혈(孕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묘를 파악할 때는 단지 그 혈상이 크고 작음만을 따지면 안된다. 부귀를 따짐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으며 혈상의 크고 작음은 부(富)를 주관하지 귀(貴)와는 거리가 있다. 즉, 부귀를 파악함에 혈판의 크고 작음 뿐 아니라 혈판의 바위와 지질강도(地質强度). 사격(沙格)을 두루 살펴야 한다. 효룡대군의 묘역에서 실펴보면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효령대군의 묘역 뒤로는 제법 멀리 가기는 하지만 한강이 가로막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기맥은 관악산에서 기원하여 뻗어내려와 서초구 우면산이나 양재동 방향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회룡고조(回龍顧祖)에 해당할 것이다. 회룡고조에서는 충신(忠臣)과 효자(孝子)가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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