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 부근에는 덕수공원이 있다. 덕수이씨들이 오래전 조상들이 사패지로 받은 땅의 일부를 공적으로 이용하고자 공원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덕수이씨들의 세장지로 조상들이 묻혀 있다. 덕수이씨들의 무덤은 덕수공원 뒤쪽에 있다. 덕수이씨들은 이순신 장군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이곳에는 5대조에서부터 몇 대의 후손이 세장되어 있다. 이중 가장 눈에 뜨이는 조상은 이변(李邊)이다. 이변(李邊,1391(공양왕 3)∼1473(성종 4)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와 호는 미상(未詳)이다.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이공진(李公晋)의 아들로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5대조이다. 세종 1년(141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무원(承文院)의 박사(博士)에 보임되었다. 한어(漢語)와 이학(吏學)을 독학하여 이에 밝았으므로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가 세종 9년(1427)에는 사역원(司譯院)의 판관(判官)이 되었고, 이후로는 다른 관직에 제수되더라도 늘 승문원과 사역원의 직책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 뒤 전농시판관(典農寺判官), 호군(護軍), 첨지승문원사(僉知承文院事), 봉상시윤(奉常寺尹), 대호군 등을 지내고, 세종 20년(1438)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사은사(謝恩使) 민의생(閔義生)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溟8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 예조참의,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세종 30년(1448) 이조 참판에 올랐다. 이 해 또성절사(聖節使)로 뽑혀 북경(北京)을 왕래하였다. 이후 형조, 예조, 이조, 병조의 참판 직을 두루 역임하고 단종 1년(1453)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형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세조 1년(1455) 세조가 즉위하면서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어 문과(文科) 중시(重試)의 독권관(讀卷官)으로도 활약하였다. 그 뒤 다시 경창부 윤과 공조 판서를 지내고, 세조 6년(1460) 중추원사(中樞院使)로 70세가 되어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한어와 이학에 밝다 하여 허락되지 않았다. 이듬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하였고 세조 13년(1467)에는 궤장(廓杖)을 하사받았다. 성종 3년(1472)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타계하였다. 인성이 노둔하여 3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한어(漢語)에 밝아 대명외교(對明外交)에 큰 공을 세웠다.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늘 한어를 쓰게 하였고, 친구와 만날 때에도 한어로 인사하고 대화를 하였으며 또 한어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즉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러한 한어 능력이 인정되어 여러 차례 사신으로 선발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는 일은 물론 왕과 중국사신 사이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한편,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상관과 자주 충돌하였는데, 이조 참의 시절에 판서가 지방관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을 비꼬아 부끄럽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성종 4년(1473) 고금의 명현과 절부(節婦)의 행적을 편집하여 한어로 번역한 《훈세평화(訓世評靴8》를 저술하였다. 육안으로 판단하기에 좌우의 교쇄가 뛰어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횡으로 가로지른 산이 교쇄를 이루었다. 그리고 먼 곳에 관악산이 자태를 드리웠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보아 명당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명당의 판단은 음택과 양택이 다르다. 만약 양택이라면 명당이라는 말이 수긍이 가는 곳이다. 그러나 음택지로서 명당이라 한다면 조금 고개가 저어지는 곳이다. 음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의 흐름이다. 기는 능선을 따라 흐른다. 이변의 묘는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의 산이 노년기 산의 형태를 보임에도 용맥에 바위가 있어 어느정도 기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음택에서 명당이라 하는 말은 결국 혈이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기맥이 약한 산은 혈을 이루기 힘든다. 예외는 있을 수 있으나 기맥이 약해도 혈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혈판이 이루어진 것을 음택에서 명당이라 한다면 이변의 묘는 명당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러나 기맥을 타고 있으며 능선상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좌우의 지각이 잘 싸고 있으니 수수한 묘역이라 하겠다. 주변의 묘들 역시 능선상에 자리하고 있으니 비교적 수수한 묘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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