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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눈이 확 뜨이는 양녕대군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1-03 조회수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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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지덕사 부 묘소는 동작구 상도4동 산65-42번지에 있다. 이곳은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묘와 사당인 지덕사가 있는 곳이다. 지덕이란 「인격이 덕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새로 지은 사당이 나타난다. 옛날 사당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 뒤로 아름다운 전순이 살짝 엿보인다.풍수 심혈법 중에 전순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심혈을 하는 전순심혈법이 있으니 말이다. 그리 높지 않은 묘역처럼 보이지만 막상 올라가 보면 대단히 넓고 아기자기하며 그 형상이 부드럽다.
태종3년에 왕세자로 책봉된 양녕은 아우 세종이 성덕이 있음을 알고 스스로 실덕을 저질러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뒤 뒤에서 세종을 보필해 주었다. 이곳에는 금자현액과 외손인 좌의정 허목과 정조가 쓴 지덕사기가 있고 양녕대군 친필인 숭례문의 탁본이 보관되어 있으며 대군의 묘소는 사당 뒷편에 있다.
1394년(태조 3) 태어난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은 태종 4년(1404) 10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 되었다가 1418. 6. 3 24세 때 태종(太宗)에 의해 충녕(忠寧-세종)한테 세자위(世子位)를 넘겨주게 된다.
양녕(讓寧)이란 글자 그대로 「양보해서 편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과연 양녕은 왕위계승을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정치적 야욕에 못 이겨 눈물을 머금고 왕위 문턱에서 쫓겨난 것인지 역사가들은 아직도 정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세종이 유덕하여 태종의 마음이 차츰 세종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을 알고 양녕이 일부러 미친 척 했다는 설을 믿고 있다.
지금까지 양녕대군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설이 있어왔다. 양녕은 처음부터 임금 되기는 틀려먹은 자유분방주의자였다는 것이 하나다.
두 번째 설은 처음에는 열심히 군왕의 도를 닦았으나 얼마 뒤 태종의 마음이 셋째인 충녕에게 기우는 것을 보고 갑자기 탁질양광(托疾佯狂), 즉 정신병을 핑게해 미친 척 연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전설적인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어쩌면 태종의 독한 성격을 알기에 대들지 못하고 이런 방법으로 나름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양녕은 열 살에 세자가 되었는데 벌써 그때부터 공부는 안하고 사냥에만 정신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동생들, 특히 충녕이 커가면서 형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게 되니 양녕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증거가 더 많다.
어찌 됐건 역사는 많은 것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 세조가 있었다면 그가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론도 있다. 그 이유는 세조는 어떤 경우라도 장자계승을 이루려 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녕은 처음부터 임금자리에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도중에 마음이 바뀌어 망나니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설이 타당하다. 언제부터인가 하면 태종 7년(1407) 양녕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고 이듬해 무렵부터다.
양녕은 일찍부터 아버지의 마음이 셋째 아들 충녕에게 기울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바로 아래 동생 효령(孝寧)은 너무 순진해서 형 다음인 자기에게 왕위가 올 것으로 생각해 아버지의 눈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매일 소리 내 글을 읽었다. 이런 효령이 너무 안타까워 하루는 양녕이 효령의 공부방을 찾아 갔다.
양녕은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효령은 놀라서 모든 공부를 집어 치우고 가야산 밑 해인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중이 된 효령은 매일 북을 치며 울분을 달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북가죽이라 하고, 미친 듯이 치는 모양을 효령 북 치듯 한다고 했다.
사실을 논하자면 태종이 양녕대군이 아니라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서 장자계승의 원칙이 무시된 셈이다. 이전의 정종은 왕의 인재가 아니었고 태종은 실질적으로 조선을 개국한 부친을 도와 공을 세웠으므로 어느정도의 카리스마와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세종은 달랐다. 민족의 영웅이고 역사적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그의 등극은 왕실의 서열에 문란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여 양녕대군이 결코 호락호락 물러난 것이 아니라는 평가도 있는 것이다.
양녕대군이란 이름은 처음부터 지어진 이름이 아니다. 처음 이름은 복이 많다는 뜻의 제였다. 제가 10세 때 세자가 되고 24살 때 세자자리를 빼앗겼다, 사양한다는 양(讓)자를 붙여 양녕(讓寧)이 된 것이다.
양녕대군의 묘는 아름다움이 있다. 겉으로 보아서는 일반 명당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입수룡 방향에서 더듬어 보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현재는 집이 들어서 맥이 보이지 않지만 입수룡을 파악할 정도는 된다. 조금 넓게 들어온 입수룡은 두개의 지각으로 갈라진다. 두개의 지각은 마치 어깨가 나오듯 비슷한 기맥으로 갈라지는데 이처럼 갈라지는 기맥 사이에는 혈판이 이루어져도 무맥이거나 비혈로 본다. 이곳도 두개의 기맥이 어깨처럼 갈라지는 곳에 작은 혈판이 있는데 비혈이다.
이와같은 과정을 겪은 기맥이 활처럼 휘어 들어오며 기를 모으고 있다. 두개의 기맥이 갈라지기 전에는 기맥이 넓게 퍼진 형상인데, 기맥이 갈라져 들어오면서부터는 통통해지고 힘이 드러나 보인다. 사맥은 전체가 사맥이 아니다. 생맥은 전체가 생맥이 아닌 것이다. 사맥 중에 생맥이 있고 생맥 중에 사맥이 있다.
기맥이 약 20미터 이상 뻗어나오는데 크게 변화가 없다. 이처럼 변화가 없이 이어지면 사맥이 뒤기 쉬운데 입수 위 우측으로 작은 지각이 뻗어나가며 보룡을 이루었다. 보룡은 생기가 넘치는 기맥의 증거다.
마치 가지 끝에 과일이 맺히듯 아주 교과서적인 명당이다. 재혈도 매우 정확하다. 교과서적인 명당을 보고 교과서적인 재혈이 이루어진 명당을 보고 싶다면 양녕대군의 묘가 그 정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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