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된 이기조선생의 묘.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1152-11번지다. 5단지 501동 앞에 이기조의 묘가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철쭉 동산이라 부른다. 조선 인조때의 문신인 이기조 선생의 묘와 신도비는 120여평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듯 조영된 묘역 앞에는 신도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철망이 쳐져 있지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돌계단이 놓여있다. 이기조(李基祚,1595(선조 28)∼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선(子善), 호는 호암(浩菴). 판서 현영(顯英)의 아들이며, 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진사로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으나,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되어 아버지 현영과 함께 수원 쌍부촌(雙阜村)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뒤이어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난 평정에 공을 세웠으며, 그 뒤 지평·헌납·수찬·교리·이조좌랑·응교·좌부승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병조참의·공주목사·호조참의를 거쳐, 1635년(인조 13)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1636년 안변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찬획사(平安道贊劃使)로서 적과 싸우기를 원하였으나 감사의 반대로 좌절되자 죽도(竹島)에 영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피란시켜 적봉(賊鋒)을 피하게 하였다. 그 후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참판을 역임하고 1645년 부제학으로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감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대동법 및 행전(行錢) 등의 문제로 김육(金堉)과 뜻을 달리하여 대립하였다. 1650년(효종 1) 효종이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위하여 ‘왜정가려(倭情可慮)’라는 이유로 청나라에 보내는 주문(奏文)에 남방의 수성연졸(修城鍊卒)을 주장하였는데, 청나라가 이를 강화조약의 위반이라고 하여 추궁, 그 책임으로 이경석(李景奭)·조경(趙絅) 등이 청사(淸使)의 사문(査問)을 받을 때 이들을 적극 변호, 신구(伸救)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돌아와 우참찬이 되고, 이어서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종묘수리에 태만하였다는 김육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로 밀려났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1653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충간(忠簡)이다 봉분은 부인 고령신씨와의 합장묘로 단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상석 앞쪽으로 동자상, 망주석, 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었다. 묘에서 약 30m 앞에 1705년(숙종 31)에 세워진 화강암으로 된 신도비가 서 있는데, 비문은 박세채가 짓고 손자 이명필이 글씨를 썼으며 외손 신완이 전액을 하였다. 매우 큰 묘역이다. 석물로는 상석과 향로석이 각 1기와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 각 2기의 석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즉 봉분을 중심으로 정면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고, 한 단 아래의 좌우에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한쌍씩 서 있다. 이 묘소에는 묘비가 없는 대신 동자석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기조의 묘는 원래 경기도 장단에 있었다고 알고 있었으나, 안내 간판에는 인근 산본에서 이장한 것으로 적혀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현재는 이곳에 있다. 다른 소문에는 장단에서 1672년에 이장하였으나 다시 산본이 개발되어 1990여년경에 현재의 곳에 이장하여 부인 신씨와 합장하였다고 한다. 이 유적은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묘역은 원래 산본동 산16번지에 있었으나 개발사업으로 1992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는데, 이장하기 전에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되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당시 봉분은 장대석으로 둘레돌이 둘러져 있었고 청화백자로 된 직사각형 판형의 묘지석 14매가 출토되었으며 묘지석의 내용으로 원래의 묘역이 1728년(영조 4) 이장되어 조성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묘의 내부는 회벽을 2칸으로 구축하여 그 안에 각각 목관을 안치한 회곽묘로 조선 중기의 양식이었다. 장단에 있었거나, 혹은 소문처럼 산본의 다른 지역에 있었는지 모른다. 후손은 조상을 잘 모시기 원하고. 나름대로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묘역은 불효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긴다. 풍수에서 음택은 죽은 자를 기맥에 정확하게 모시는 것이다. 즉 생기란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생기를 온전하게 태우는 것이 조상을 모시는 방편이다. 이에 따라 좌향이 정해지는 것이다. 생기는 능선을 따라 흐른다. 측면으로 흐르는 경우는 지극히 드믄 경우이다. 이기조의 묘역을 살펴보면 입수룡이 약하기는 하나 기맥이 흐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묘역은 기맥의 허리를 싹둑 도려내듯 파고 조성하였다. 좌향은 오로지 자좌오향(左坐午向)이라는 사실에만 한정한 듯하다. 이러한 결과는 헛된 풍수의 농간이며 억지다. 혈이 없다면 기맥이라도 타야 한다. 이처럼 묘역을 잡아 틀어 좌자오향으로 맞춘 것은 지나친 억측이며 욕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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