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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절맥(絶脈)의 전형인 조서강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1-10 조회수 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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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찾아가기

인천 서구 석남동 산119-2번지


* 관산주안점


경인고속도로 서인천 나들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신석초교 부근에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경은(耕隱) 조서강(?∼1444) 선생의 묘소이다. 인천 서구 석남동 산119-2번지는 신석초교 뒤쪽에 있다. 부근에 택배회사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 좌측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묘역이 보인다.
조서강은 조선 개국 공신 조반의 아들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자경(子敬), 호는 경은(耕隱)이다. 1415년(태종 15)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뒤 그 해에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했다. 장령을 지내고 1431년(세종 13 )에 춘추관 기주관이 되어 《태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우관원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441년에 도승지를 지냈으며, 1443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조판서 역임 후 사직할 것을 청하고 부친 조반의 별장이 있던 가정(佳亭)에 은거하였다.
그가 은거하자 세종은 궁중의 화가를 보내 가정에서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였으며, 이후 많은 선비들이 가정을 주제로 시를 지었다. 안평대군은 이를 모아『석호가정별업도』라는 서화집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죽자 세종은 관곽(棺槨) 등을 하사하고, 나라의 큰 재목이라는 제문(祭文)을 지었다.
계단을 오르면 곧 묘역이 나타난다. 그의 묘는 직사각형 기대석으로 둘러 쌓인 가운데 둘레돌을 두른 봉분이다. 전방후원묘(前方後圓墓)로 되어 있고 앞에는 묘비와 상석, 한 쌍의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비신과 기단이 일체형을 이루고 있는 묘비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조공지묘(嘉善大夫吏曹參判趙公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옥개석이 얹혀져 있으며 비 후면에 새겨진 글씨는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다. 봉분 우편에는 ‘백천조공위서강지묘 배정부인동래정씨부좌’라고 하는 후대에 세운 묘비가 있다. 조서강묘와 묘역에 설치된 석물들은 조선 초기의 것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묘역을 조성할 때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일러 흔히 [5대불가장지]라고 하는데 이중에 한 가지가 바로 [절맥]이다. 즉 기맥이 끊어진 것을 말하는데 조서강의 묘역 후면에는 4차선 도로가 뚫려 차들이 왕래하니 바로 절맥이다. 절맥은 자연적인 절맥과 인위적인 절맥 모두 해당된다.
조서강의 묘역은 앞에서 보아 전순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노룡(老龍)임을 알 수 있다. 즉 노년기 산이 보여주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묘역은 인작(人作)이 어느 정도는 가미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입수방향의 용맥이다. 음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혈사수(龍穴沙水)이다. 즉, 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용을 타고 흐르는 기맥이다. 그러나 기맥이 끊어지고 말았으니 묘역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예로부터 절맥지에서는 이장을 권장하는 것이 풍수사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나온 묘역은 절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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