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찾아가기
중종의 후손으로 알려진 이수선생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산17-1번지에 있다.
* 개관
평소 사당 문이 닫혀있어 출입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약 30여미터를 거슬러 올라간 묘역 방향으로 작은 길이 있어 출입이 가능하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묘역의 전순에 도달하고 아래로는 사당과 신도비가 나타난다. 神道碑는 묘역 하단에 위치한 사당 정희사 우측에 東向하여 세워져 있다. 비문은 이재가 찬하고 이승휘가 서 하였으며 이태현이 전액을 썼다.
묘역을 따라 오르면 전순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곳에 2기의 묘가 있다. 지나치게 기운 곳을 파고 묘를 조성하였는데 만약 상부의 묘가 혈처를 이루었다면 2기의 묘가 자리한 곳은 전순에 해당한다. 올라가 보면 멍석같은 묘역이 나오는데, 한눈에 보아도 천하에 보기드믄 명당이다. 이곳은 궁내동 선산이다. 최상부의 묘 1기는 봉래군 이형윤(蓬萊君 李炯胤)의 묘이며, 바로 아래에는 이수의 묘역으로 東向하여 있으며 부인 정씨와의 합장묘인 쌍분이다. 봉분의 하단에는 높이 35㎝, 한면 길이 2m인 장대석을 이용해 둘레 15.6m로 護石을 8각형태로 둘렀으며, 봉분의 높이는 140㎝이다. 이수 묘의 아래에는 구성도정증구성군과 贈縣夫人昌寧成氏 贈縣夫人坡平尹氏(증현부인창녕성씨 증현부인파평윤씨) 의 묘가 위치한다.
최상부에 있기는 하지만 이형윤은 이수의 부친은 아니다. 이형윤(1593∼1645)은 광해군·인조대(光海君, 仁祖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여승(汝承)이다. 덕양군 기(德陽君 岐)의 증손으로 풍산군 종린(豊山君 宗麟)의 손자이며 구천군(龜川君) 이수의 아들이다. 사도사첨정 정인수(司導寺僉正 鄭麟壽)의 외손이다. 아버지인 이수의 묘 위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역장에 해당한다. 1612년(광해군 4)년에 종시(宗試)에 2회나 장원하여 봉래군(蓬萊君)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명선계(明善階)와 가선계(嘉善階) 에 올랐다. 또 오성 이항복(鰲城 李恒福)과 일송 심희수(一松 沈喜壽)가 장시관(場試官)으로 만나보고는 종실(宗室)에서 영재가 나왔다고 칭송하였다. 묘는 동향이며 완산현부인최씨(完山縣夫人崔氏)와 합장분이다.
두 번째 쌍분이 이수 선생의 묘다. 이수(1569∼1645)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全州(전주) . 자는 明遠(명원) . 中宗(중종)의 증손. 德陽君 岐(덕양군 기)의 손. 豊山君 宗麟(풍산군 종린)의 자. 廣州牧使 朴諫(광주목사 박간)의 외손. 司導寺僉正 鄭麟壽(사도사첨정 정인수)의 서. 15세에 例(예) 에 따라 龜川副正(귀천부정)을 제수받았다. 임진왜란시 국왕을 호종하였다가, 分朝(분조)의 명에 따라 宣傳官(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임란을 겪는 동안 璿源錄(선원록)이 흩어져 없어졌으므로, 1604년(선조 36)에 종친 중에서 문장과 덕망이 있는 자를 뽑아 수집하고 바로잡게 하였는데, 공을 郎官(낭관)으로 삼아 정리하도록 명하였기에 참여하여 일을 끝내자 특별히 한 계급이 올려졌다. 1611년(광해군 3)에는 규례에 따라 正義大夫(정의대부)로 승격되고 封君(봉군) 되었다. 77세인 1645년에 南小門洞(남소문동) 집에서 별세하자 顯祿大夫(현록대부) 로 증직되었고 시호는 忠肅公(충숙공) 이다.
이수의 묘역 아래에는 형인 구성군의 묘가 있다. 다른 묘역과 비교해 그다지 좋은 장소는 아니며 협소한 과협처에 해당한다.
여인의 허리처럼 오무라진 과협처 아래에는 두레방석 같은 넓은 터가 있고 쌍분이 있으니 이기(李岐)의 묘다. 이기(1524∼1581)는 본관은 전주. 자는 伯高이며 중종의 다섯째 서자다. 모는 淑媛李氏이고, 부인은 安東權氏로 예조판서 纘의 딸이며 永嘉君夫人에 봉하여졌다. 9세 때 德陽君에 封君되었으며, 어머니를 일찍 사별하여 중종의 사랑을 받았고, 형제인 인종, 명종과도 우애가 돈독하였다. 명종 때 宗親府, 宗簿寺, 司饔院, 文昭殿, 延恩殿등에서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대에도 종실로서의 尊禮가 융숭하였고, 특히 음률에 해박하였다. 공은 평생 귀한 신분임에도 교만하지 않았으며 겸손과 절약을 삼가 실천하였다. 1581년(선조 14)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나니 부음을 들은 선조는 크게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禮官에 명하여 조문하게 하고 太常에 명하여 제물을 내려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 해 9월에 광주 낙생리 와동(현 성남시 궁내동 산17)에 장사지냈으며, 12년 뒤에 永嘉君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공의 산소에 쌍분하였다.
* 참고자료
상기 내용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1994년에 발표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이다. 그밖에 1998년판『경기문화재대관』, 경기도에서 1992년 6월판으로 발행한 『京畿金石大觀 』, 극립문화재연구소, 2000년판『군사보호구역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경기도편-』, 1998년판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포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고적조사보고 제7책)』, 2000년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학술조사총서 제8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성남 문화원 인터넷 자료를 옮겨왔다.
* 주안점
부근에는 많은 전주이씨들의 묘가 있다. 골짜기 안에는 많은 명당이 있고 대부분 임자가 있다. 우선 최상부 묘역에서 구성군에 이르는 묘역은 이형윤과 이수, 구성군으로 이루어지는데 근본적으로 경사가 심하다. 경사가 심할 경우에는 아무리 용맥이 강한 기가 넘쳐도 결지되기 어렵다. 이는 과룡이기 때문인데 강한 힘은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결혈이 이루어져야 음택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결혈이 이루어지려면 완만해야 한다. 그러나 이 3기의 묘역은 완만한 경사나 멈춤을 이루지 못해 응결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형상학적으로 명당이 아니다. 가장 눈에 뜨이는 묘역은 가당 하단에 자리한 이기의 묘다. 위에서부터 3기의 묘역인 구성군의 묘역과 가장 아래의 묘역인 이기의 묘역 사이에는 마치 여인의 허리처럼 가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과협(過峽)이다. 달리 인후(咽喉)라고 부르기도 하는 구간으로 유혈에서는 반드시 과협이 있어야 한다. 과협은 기를 모아 불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사람의 목과 같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역장(逆葬)에 해당한다. 일부 가문에서 역장을 불가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예로부터 역장은 이루어져 왔다. 이는 죽은 조상에 대한 불경이라 여겨지는 일면도 있으나, 죽은 자에 대해서 묘역은 역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역장은 왕릉묘제에만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게 사용 하였다. 이기의 묘역은 전형적인 유혈이다. 과협에서 모아진 기가 강하게 모아져 구성된 혈판은 좌측으로 강하게 구부러진 좌선(左旋)이다. 神道碑는 묘역 하단에 위치한 사당 정희사 우측에 東向하여 세워져 있다.혈판이 높으니 귀(貴)하다.이곳에서 혈판을 이룬 곳은 이기의 묘 뿐이다. 따라서 후손은 나중에 묘역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눈여겨 볼 것은 이기의 묘역 아래 전순에 조성된 2기의 묘다. 예로부터 “조상묘 부근은 망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경우다. 훌륭한 조상의 묘역 부근에 묘역을 조성할 경우, 전순이나 지각에 조성되기 쉽다. 이처럼 후손의 묘역이 전순에 조성될 경우, 수맥(水脈)에 걸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기맥이 없거나 산맥지에 해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다.
좌우측 산들이 모두 잘 감아주고 있어 교쇄가 뛰어나다.좌향(坐向) 부분에서는 형기와 이기가 다르다. 형기는 좌향보다 기맥의 흐름과 형상을 중히 여기는데 형기에 따르면 기맥의 방향으로 좌향을 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기론에서는 좌향이 수구와 득수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기본 이론에서는 수구와 득수에 따라 좌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론도 있다. 즉, 만고불변의 법칙인 기맥의 좌향을 사용하고 그 향과 득수, 파구를 비교하여 판별하는 이론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사용하고 적용하는 자의 지식과 지혜, 혹은 기본이념에 따른 것이다. 물론 중요한 이론과 법칙이 있지만 어느 것이 진정한 법칙이고 우리 문화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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