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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주변씨 시조, 변안렬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2-06 조회수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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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원주변씨(原州邊氏)는 왜 시조의 묘를 원주와 아주 먼 남양주에 모셨을까? 사실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성씨의 고향이라는 관향은 보통 특출난 인물이 어느 특정지역을 사패지로 받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원주변씨의 사패지는 원주가 아니었을까?
원주(原州)는 강원도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인데 신라시대에 북원소경, 940년(고려 태조23)에 원주로 고쳤다. 원주변씨(原州邊氏)는 황주변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고려말의 절신인 변안렬이다.

변안렬(1334∼1390)은 고려 말의 무신으로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이다. 아버지는 증판삼사사(贈判三司事) 양(諒)이다. 원래 변씨는 황주(黃州)를 본관으로 하고 있었는데, 안렬의 할아버지 순(順)이 1268년 원나라에 들어가 심양후(瀋陽侯)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양이 이어받았다. 안렬은 병란으로 심양에 가 있던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 본관을 하사받았다. 이로써 안렬은 원주 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원주 변씨(原州 邊氏) 묘역은 시조인 변안렬의 직계 자손들이 있는 진건면 용정리를 중심으로 별내면 광전리, 조안면 송촌리 등지에 조성되어 있다. 시조인 변안렬의 묘역이 용정리에 있다.
사능리는 진건읍이 있는 지역인데 사능이라는 아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능이라고 불리므로 지역 이름도 자연히 사능이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변안렬의 묘는방향이 다르다.

원주변씨들의 세장지는 사능과 오남리 사이에 있는데 찾기 쉬운 방법은 진건읍으로 가는 것이다. 진건읍에서 진접읍으로 가는 길이 두개 있다. 이중 하나는 86번 도로로 진건 읍내에서 멀리 퇴계원을 바라보는 쪽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오남리로 가는 길이며 용정리를 가려면 이 후자의 길을 타야 한다.
진건읍에서 한신 아파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독정리, 오남리 방향으로 가는 길을 찾아 마을을 나서자 마자 죄측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목이 있고 입구에 대은변안렬묘역임을 알리는 간판이 있다. 물론 길바닥에도 돌로 만든 표석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나무 사이로 난 길을 넘어가면 불과 300미터 사이에 오른쪽으로 묘역이 있다.

묘역까지는 약 100미터가 넘는다. 멀리서 보아도 잘 꾸며져 있다. 묘역으로 올라가면 묘하에 신도비가 먼저 반긴다.
기이한 것은 묘역아래 망주석이 있다는 것이다. 봉분과 멀리 떨어져 마치 보초를 서듯 서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묘역은 진건면 용정리 산197번지에 진한국부인 원주 원씨와 쌍봉으로 서향하고 있다. 묘역은 새로 조성되어 전체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는데, 호석, 묘표, 상석, 향로석, 양석, 장명등 등 석물을 새로 만들어 세웠고 옛 것은 망주석(139)만 남아 있다. 이전의 묘역에는 문인석 등 석물이 있었으나 새로 묘역을 조성하면서 그 자리에 묻었다고 한다. 묘 우측에 또 하나의 묘표가 있으며, 그 우측에는 이전 묘표가 있다. 이전 묘표는 아주 작다.

입수에 올라 살펴보면 입수룡이 노년기 산이라 약룡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리저리 갈라진 모습이 약룡의 모습이고 약룡에서는 혈이 맺히지 않는 특징을 감안하면 변안렬의 묘와 혈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기맥은 흐른 것으로 파악하고 묘역을 조성했을 것인데 기맥은 산맥지지의 형상을 보인다. 묘역의 가장 위쪽은 깊이 판 흔적이 보이고 앞의 전순이 있어야 할 자리는 애초의 자리가 보이고 그 위에 인작으로 쌓은 모습이 역력하다. 형상적으로는 좌청룡과 우백호가 앞으로 뻗어나가고 벌어진 형상이다. 그래서 앞을 가리기 위해 가로로 지른 산이 하나 뻗어 있다. 이같은 형상으로 보아 교쇄는 잘 이루어졌으나 혈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교쇄가 잘 이루어졌으니 바람의 영향은 받지 않는다. 주위 사격은 보았으나 내몸을 찾지 못한 묘다.

변안렬의 묘역에서 약 300여미터를 올라가면 우측으로 새로 조성한 원주변씨의 제각이 나타난다. 정면 우측으로 보이는 묘가 기맥 끝에 있다. 이곳이 부마공의 묘역이다. 용정리 묘역은 고려 양식의 묘표와 망주석, 문인석 등이 있으며 시기가 오래되어 마모된 것이 많아 그 옆에 석물을 새로 조성한 것도 있다.
이곳 원주변씨의 묘역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명당은 부마공의 묘다. 부마공의 이름은 변상복(邊尙服)이다. 주변의 다른 묘역들과 비슷하게 약룡의 형태를 보이는 보이는 지맥에 쓰여진 산소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힘을 모아 응기되어 결혈을 이루었다. 주변의 산세가 물기가 적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데 변상복의 묘는 그나마 무리가 덜하고 형태도 좋다.

변상복(?∼1455)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호는 송헌(松軒)이다. 원천부원군 안렬의 손자이며 세종 때 도총제를 지낸 변이의 아들이다. 덕천옹주(德川翁主)가 하가(下嫁)하자 원천위(原川尉)에 봉해졌다. 1452년(단종 즉위)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고, 1455년 강릉부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묘역은 용정리 원주 변씨 사당 좌측에 덕천옹주와 합장묘로 남서향하고 있다. 봉분은 고려식의 직사각형으로 좌우와 앞에만 호석(43)이 있는데, 뒤에서부터 작은 돌을 쌓고 점차 큰 돌을 둘렀다.
유혈이라는 특징 외에 특이점을 보이는데 청룡과 백호가 열려 교쇄가 약함에도 정면에 보이는 산이 전형적인 아미형을 지녔다. 아미형과 반월형의 중간정도 형태를 지닌 산이 앞을 막고 있다. 안산으로서 는 매우 뛰어나다. 이미형과 반월사의 중간형이라 하지만 이는 미인과 관계 있는 사격이다. 예로부터 풍수에서 미인이란 단순이 아름다운 여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귀인(貴人)을 따로이 부르기도 하는 말이다. 능히 살필 가치가 있는 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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