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고려 개국공신인 조맹(趙孟)의 후손이 세웠다고 한다. 조맹이 이곳에 숨어 살며 도를 닦다가 약사불을 보았다고 하며, 후손들이 선조의 유적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중기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맹이 마셨다는 우물 독정(獨井)이 사찰 내에 있다. 이 우물 때문에 절 이름을 독쟁이절이라 부르며, 절 아랫마을을 독정리라 부른다. 또 조맹이 기거하던 수양굴(修養窟)이 약사전 뒤에 남아 있으며, 조씨 문중에서 이름 있는 사람이 죽으면 가지가 하나씩 말라 죽는다는 기념송이 있다. 창건 후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860년(철종 11) 조맹의 후손 혜소(慧昭)가 법당과 화양루(花兩樓)를 중수하였으며, 1882년(고종 19) 서린(瑞麟)이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약사전, 화양루, 산신각, 요사 등이 있다. 화양루에는 《견성암중수기》와 《견성암중수각부탱화신성기》가 남아 있고,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그린 탱화와 영산회상도 신중탱화 독성탱화 지장시왕탱화 현왕탱화가 걸려 있다. 모두 1882년 서린이 중수할 때 제작된 유물들이다.
사찰 은 깍아지른 듯한 골짜기 안에 있다. 따라서 바람이 밀려오는 듯도 하지만 살풍은 아니다. 비교적 강한 비탈이 자리하고 있어 앞이 트인 듯 보이지만 눈보다 낮은 산이 첩첩으로 싸고있어 비교적 교쇄가 잘 이루어져 있다. 뒤로는 첨봉처럼 보이는 산이 막고 있어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산신각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풍수를 공부하는 후학들은 산신각의 특징적인 모습이 바로 공부가 될 것이다. 산신각은 다시 불사를 일으켰는데 아직 제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견성암에서 가장 기맥이 강하고 혈심이 잡힌 곳이다. 혈의 모습을 갖춘 곳이다. 산신각은 바로 이 혈심위에 세워져 있고 앞은 바위로 막혀져 있다. 전순이 바위로 막혀져 있으니 천년 만년이 지나도 무너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뒷 편으로도 바위가 적지 않으니 묘역으로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럽다.
풍수의 아론에서 동기감응이라는 이름이 있다. 동산(銅山)에 대한 전설도 전해진다. 즉, 동기감음이란 줄여 말하면 좋은 기운을 가진 선현의 기운이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산이나 절, 교회, 성당을 찾는다. 과거에는 성황당이나 산신각을 찾았을 것이다. 살아있는 몸이기는 하지만 좋은 기운이 기도하는 사람의 몸을 타고 동기감응으로 자손에게 전해진다는 논리다. 따라서 불공을 드리더라도 이왕이면 좋은 장소, 즉 기감이 좋고 영험이 좋은 곳에서 기도를 드리자는 것이다. 풍수적으로 견성암의 산신각은 그같이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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