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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풍양조씨(豊壤趙氏)시조 조맹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2-06 조회수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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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풍양조씨의 시조(始祖)는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맹(孟)이다.
「풍양조씨세보(豊壤趙氏世譜)」에 의하면 그는 초명(初名)이 암(巖)으로 한양부 풍양현(漢陽府豊壤縣:현 양주군 진건면 송능리) 출신이며, 태조(太祖:왕건)를 도와 고려 건국(高麗建國)에 공(功)을 세우고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올라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下賜)받고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는 본래 초명이 바위(巖)였는데 만년(晩年)에 고려 태조(太祖) 왕 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상주국삼광문하시중평장사(上柱國三匡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다.
그 후 후손(後孫)들이 시조(始祖)의 세거지명(世居地名)인 풍양(豊壤)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界)를 이어왔으나 시조 이하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일세조를 각기 다르게 하는 두 계통(系統)으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풍양 조씨(豊壤趙氏)가 세거지로 삼은 풍양(豊壤)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옛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高句麗)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황양(荒壤)으로 고쳐 한양군(漢陽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후에 풍양으로 고쳐 양주에 속하였다. 그 후 포주(抱州)에 이속되고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다시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조맹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송릉리에 있고 매년 음력 9월 초정일에 향사한다.사능에서 390번 도로를 타고 남양주시청이 있는 금곡동으로 향하다가 첫번째 다리가 있는 곳에서 살피면 광해군 묘를 찾아가는 푯말이 보인다.
초행자는 이 마을에서 성묘를 물어보는 것이 좋다.영락교회 공동묘지를 지나 더 올라간다. 부근에는 묘역을 관리하는 후손도 살고 있다.
계곡 안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뒤로 가면 붉은 벽돌로 지은 제각이 보인다. 그 입구에 신도비가 서 있다. 백대리석 신도비와 오석 신도비가 함께 서 있고 좌측에는 작은 돌비석이 입구를 알린다. 묘역까지 깔려잇는 게단을 오르면 마치 성벽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보이는데 이는 제절을 넓히기 위해 후손들이 넓힌 것이다.
묘역에 오르면 후손들이 역사를 크게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석물이 보이고 새로 쌓은 계단이 보이며 지나친 치장이 눈에 뜨여 약간은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묘에서 이어지는 과협이 요동치듯 보이는 모습이 당판에 흘러드는 용맥이 가히 짐작할 만하다. 옛글에 이른 “미론천리지내룡(未論千里之來龍)일지라도 단간도두지응결(但看渡頭之凝結)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1000리 내룡이 무엇하리요. 입수 위 1절만 보아도 당판에 드는 용맥을 판단할 수 있음이다.
전순과 당판은 인작이 가해져 옛날의 모습이 변했으나 혈판의 모습은 완연하고 오악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단 안타까운 것은 묘역을 성대히 하느라 아래로 내려쓴 듯 보이고 위쪽 우선 방향의 선익이 발달한 당판이 있어 다시 하나의 묘역을 조성할 수 있다. 아름다운 명당이다. 주변의 산세도 정다우니 살이 없고 일가의 개조가 자리잡을 땅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작이 가해지고 마치 성벽을 쌓은 듯 보이는 지나친 치장이 멋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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