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찾아가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6번지
* 개관
임해군(1574∼1609)의 초명은 이진국(李鎭國)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째 왕자였으나 성질이 난폭하여 세자의 자리를 광해군에게 빼앗겼다. 1585년 참의 허명(許銘)의 딸과 혼인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함경도로 의병을 모집하러 갔으나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여러 차례 협상 끝에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후 성질이 더욱 난폭해져 행패가 심하였다. 1603년 사옹원도제조가 되었고, 1608년 선조가 훙서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명나라에서 장자인 그의 동향을 심사하러 오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강화의 교동으로 옮겨져 이듬해 사사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물러나자 그의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 주안점
임해군의 묘는 비교적 수수하다. 높지 않지만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금형의 주산을 등에 지고 마치 말의 안장처럼 생긴 유혈에 묘역을 정하고 있다. 대좌형에 속하지만 높지 않아 대좌형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곳이지만 유혈의 혈상을 지녔다. 사사된 왕자의 묘역치고는 응결이 이루어진 혈로 볼수 있다. 유혈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혈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흠도 눈에 잘 뜨인다. 즉 전면의 안산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 안산은 본신룡에서 뻗어나간 형상인데 마치 문필봉처럼 솟아올랐다. 안산이 융기하면 말자가 불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김번의 묘와 매우 닮은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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