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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극전(北極殿)이 기억에 남는 흥천사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2-07 조회수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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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흥천사(興天寺)는 제법 유명한 사찰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이곳을 흥천사라 하지 않고 신흥사라 부르고 있다. 행정적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2동 595번지다.
성신여대 역에서 아리랑고개 방향으로 약 500미터 이상 걸어가면 흥천서와 가까워진다.

신흥사라고도 불리는 흥천사는 정릉(貞陵),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이다. 흥천사는 태조 6년(1397)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사찰로 오늘날 중구 정동에 창건되었던 170여 간의 대사찰로 조계종의 본산(本山)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6년에 정릉을 조영하고 나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를 건립하도록 하였다.이어서 태조7년는 절 북쪽에 사리전(舍利殿)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 전각은 안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안치한 4-5층의 건물로 태조가 조성에 특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공사 기간 중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지만 드디어 정종 원년(1398) 10월에 완성 되었다. 개성에 머물고 있던 태조는 사리전 완공 소식을 듣고 바로 한성에 달려왔다. 그리하여 사리전의 낙성을 기념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열어 선왕(先王)과 조상들의 명복을 빌었다.
태종 9년(1409)에 정릉을 현재 자리인 북한산 기슭으로 옮겼지만 흥천사는 계속해서 도성 안의 주요 사원으로 지위를 누렸다. 태종은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제한하고, 전국의 242개 절만 남겼으며 사찰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흥천사를 잘 보호하라는 태조의 유언을 좇아 흥천사는 그대로 법등을 밝혀 나갔다.
세조 7년(1461)에 제작한 흥천사 대종(大鐘)은 동대문을 거쳐 종루(鐘樓)에 걸려 시각을 알려 주었다가 일제 때 덕수궁에 옮겨져 현재까지 걸려 있다. 흥천사가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선조9년(1576)에 정릉이 복원되면서 부터 였다.

태종 9년에 정릉을 북한산 아래로 옮겼을 때 능 가까이에 신흥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그러나 신흥암은 정릉과 너무 가깝다 하여 현종 10년(1669)에 석문(石門)밖 합취정(合翠亭) 터로 이건하고 신흥사(新興寺)라고 개칭 하였다.
그 후 정조 18년 (1794)에 승려 성민(聖敏),경신(敬信) 등의 뜻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고, 고종 2년(1865)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각도에서시주를 받아 절을 중창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흥천사라는 이름으로 복원 하도록 하고, 흥천사(興天寺)라는 휘호를 내렸으므로 지금도 만세루에 그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절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였던 영친왕이 다섯 살 때 쓴 글이 이 절에 남아 있고, 조선왕조의 최후의 왕비 윤비가 6.25전쟁 때 피난 갔다가 돌아와 이곳에서 매우 어렵게 살았다.

흥천사 내에는 이 절의 중심 건물인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오른편에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작은 종루가 사람의 눈을 잡는다.
계단을 오르면 흥천사라는 간판을 단 당우가 나타난다. 당우는 벽돌과 목재로 지어진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면 좌우로 마루가 나와 양반집의 구조처럼 여겨진다.
자세히 보면 이 당우는 특이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 사찰의 당우는 비교적 단순하여 일자형이 대부분인데 이 당우는 영어의 H자, 한문의 공(工)자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도투마리집이라고 하는 구조다. 도투마리는 옛날식 베틀 기구인데, 실이 서로 엉키지 않기 위해서 사이사이 뱁댕이라는 가느다란 회초리를 끼워야 했고, 때문에 40자 한필 짤 날실을 다 감자면 부피가 엄청났다. 그래서 생긴 모양이 H자형이다.
도투마리 도구처럼 생긴 이 집은 튼튼하고 안정감이 있게 보이고 또 구조학적으로 편할 수 있지만 풍수적으로는 매우 좋지 않다. 예로부터 “적을 망하게 만들려면 도투마리 집을 지어주어라.”하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즉, 도투마리 집에 살면 가난해지게 되고 심하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인 판단으로는 가난해지는 것으로 본다.
뒤로 돌아가면 극락보전이 나타난다. 좌측의 용화전은 현대식 재료인 붉은 벽돌을 이용해 지었다. 흥천사는후면으로 가면 갈수록 전통의 당우 모습이 나타난다.

극락보전 앞에는 이 건물이 유형문화재 제66호임을 알리는 간판이 있다. 극락보전은 철종 4년(1853)에 구봉 계장(九峰啓壯) 스님이 중수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극락보전이란 십겁(十劫) 이전에 성불(成佛)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이 부처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중생이 염불을 하고 일념이라도 지심회향(至心廻向)하면 곧 왕생할 수 있게 해주며, 그 때 서방에서 성중(聖衆)이 와서 그 사람을 맞이해 간다고 한다. 그 세계에 살게 되면 다시는 전생(轉生)하지 않으므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보전에는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살기 좋은 극락의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불상과 그 뒷면 벽에 아미타불화가 배치된다.

우측을 보니 창연함이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극락보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이 건물은 유형문화재 제67호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안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 판관, 인왕상 등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뒷면 벽에는 지장보살의 모습이 담긴 불화와 시왕(十王)을 그린 불화가 걸려 있다.
명부전이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해주는 지상보살을 명부, 즉 저승의 주존으로 모신다.

두개의 당우를 지나 뒤로 돌아가면 해안가에서나 볼 수 있는 바위가 보이고 그 앞에 흰분을 칠한 관음상이 있다. 살펴보면 중출맥(中出脈)으로 뻗어 내려온 용맥의 끝자락에 기맥막이로 토출된 바위다. 따라서 기가 강하게 운집되는 곳으로 기도를 하거나 소망을 비는 장소로는 좋은 곳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두채의 당우가 보인다. 살펴보니 바위가 당판을 이루었다. 유혈의 혈상을 지니고 있는데, 당판이 온통 바위다. 혈장이 완연하다. 당우에는 눈에 뜨이는 이름이 붙어있다. [북극전]이 당우의 이름이다. 북극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칠성전의 다른 이름인 북극전(北極殿)은 우리의 전래된 신앙의 한 모습이다.
북극전은 칠성신을 모시는 곳인데, 칠성신(七星神)은 사람의 수명과 부귀, 농사와 생사 그리고 화복 등의 사항을 관장하는 신이다. 각처의 절에는 지금도 산신각(山神閣)과 나란히 칠성당을 모신 곳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북두칠성을 가르 켜서 칠성신, 칠원성군, 칠성여래 등 다양하게 부른다. 특히 칠성신은 사람의 조상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출생과 관련있기 때문에 생남축원(生男祝願)의 장소로도 이용된다.

옆의 전각은 독성각으로 종교적 의미는 있으나 풍수적 의미는 약하다. 북극전은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 아들 얻기를 소원하는 곳이다. 기도란 마음의 염원이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과 하늘의 기운, 땅의 기운이 합일되는 것이다. 즉, 천지인 합일이 소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혈판에서의 소망은 어떤 곳에서의 소망보다 큰 힘을 나타낸다. 더구나 바위로 이루어진 혈판에서의 기도는 그어떤 곳에서의 기도보다 영험하다. 풍수에서의 동기감응에 부합되는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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