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망봉(東望峯)은 슬픔의 역사다. 동망봉은 젊은 나이에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된 후,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는 아침저녁에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에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연이 전한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린 것이다.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의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여량부원군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단종 2년) 정월 왕비에 책봉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에 봉해지자 의덕왕대비(懿德大王妃)에 봉해졌으나, 1457년(세조 3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면서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정순왕후가 1521년(중종 16년) 6월 4일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우로 양주(楊州, 현재의 남양주시) 남쪽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사릉리)에 모셔졌다. 그 후 후 숙종 24년(1698년) 11월 6일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다시 올려져,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는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이라 했다.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 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또『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를 동정하여 끼니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자 여인들이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 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설동역에서 전철을 내려 성북구청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얼마가지 않아 길 옆에 보문제일교회간판이 나타난다. 이 간판은 제법 커서 잘 보이는데 그 아래 매달린 동망봉산신각의 간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산신각은 왼쪽에 있다. 입구에서 약 500미터의 거리다. 교회 좌로 길을 따라 올라간다. 계속 올라가면 길이 많지만 무시하고 끝까지 직진한다. 마지막에는 작은 계단이 한시방향으로 나고 길이 끝난다. 그리고 왼쪽으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약 30미터를 가면 길이 꺾어지는 아래쪽으로 산신각이 있다. 그러나 늘 철문이 닫혀있어 출입이 지유롭지 못하다.
산신각은 조선 초 단종비(端宗妃) 정순왕후 송씨가 매일 조석으로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冥福)을 빌었던 곳에 산신을 제사하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다. 산 정상에 해당하는 청룡사 동쪽 앞에 우뚝 솟은 바위산을 동망봉이라 하는데, 이 곳에는 숭인공원이 있다.숭인동과 보문동의 경계가 되는 동망산 서쪽 부분은 일제 때부터 광복 후까지 채석장으로 쓰였으므로 산의 반쪽은 사라져 절벽이 되었다.
조선 후기 영조 47년(1711) 영조는 창덕궁에 갔다가 현재 동대문구 숭인동인 연미정동(燕尾汀洞)의 정업원을 들러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물어보았다. 이때 전 참판(參判)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슴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영조는 지난날의 일을 듣고 나서 친히 청룡사 자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망봉 산신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일반인은 출입이 어렵다. 담 밖에서 보면 겨우 10여평의 공간인데, 일대가 깎아지른 듯한 산의 사면을 다듬어 지은 집들로 다닥다닥 붙어있어 답답하다. 산신각도 겨우 10여평을 차지하고 있는데 출입도 어렵다. 산신각은 특이하게 뻗어 나온 석맥(石脈)에 이어져 있다. 사당이기는 하나 이곳이 무속적 의미가 있고 소원을 비는 행위가 있음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사당이지만 산신각이라 했을 것이다. 세파속에 묻혀 있다고는 해도 기맥의 강한 감응은 사라지지 않는다. 강한 기맥에 자리한 산신각은 어수선한 지역의 불합리 속에서도 기도처로서는 영험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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