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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장 되어진 이집의 묘역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2-28 조회수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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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성남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된 둔촌 이집선생묘는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7-1번지에 있. 묘역은 중원구 하대원동 대한주택공사 재개발건축으로 지어진 아파트 뒷쪽 산으로 들어가 나지막한 능선에 西向(서향) 하여 있다.

이집은 광주이씨다. 광주이씨의 시조는 이당이나 간혹 이집을 시조로 하는 일가도 존재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당을 시조로 하는 집안과 합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집의 부친인 이당이 광주이씨의 시조인 것 같다.

이집은 고려 충숙왕 14년(1327)인 정묘년에 출생하였다. 학자이며 문신인 이집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초명은 원령(元齡)이고 자는 성노(成老) 혹은 호연(浩然)이다. 호는 묵암자(墨岩子)와 둔촌(遁村)이라고 쓰지만 둔촌이라는 호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집은 광주이씨의 시조인 당(唐)의 자(子)로 학문에 깊이가 있어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교류하였다.

고려 충목왕 3년인 정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해박한 지식과 고상한 지절(志節)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들이 광주 역리(廣州 驛吏)로서 오랫동안 세거해 왔는데, 당시 역리는 과거에 응시할 수가 없어 입사(入仕)하지 못하였다. 이후 이 지방의 향리(鄕吏)로 이속(移屬)되면서 벼슬에 오를 수 있었고 후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공민왕 17년인 무신년에는 역승 신돈을 오역<나무라고 거스린다는 말>한 까닭에 앞으로 반드시 닥쳐올 화를 미리 예측하고 노부를 업고 도망하여 과거동기인 영천 최원도의 집에서 은거하다가 공민왕 18년인 기유년에 부친 상을 당하여 서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면서 영천군 나현자좌에 안장했다.

아버지 이당의 묘역은 최원도가 자신의 부친을 모실 자리로 잡아 놓았던 곳이라 하니, 우정과 신의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최원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광주이씨는 번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민왕 이십년인 신해년에 신돈이 역모로 주살된 후에야 비로소 송경용수산 밑 현화리 옛집으로 돌아왔다. 뒤에 벼슬을 버리고 여주 천령현으로 낙향하여 많은 은둔지사들과 교류를 하였다. 우왕 13년인 1387년에 사망하였다. 조선조에는 의정부좌찬성의 직을 내렸다.

신돈의 주살 후 옛집인 송경(松京)의 용수산(龍首山) 아래 현화리(玄化里)로 돌아와 살았다. 이어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지금의 여주 금사면 이포에 해당하는 여주 천령현(川寧縣)에서 독서와 농경으로 세월을 보냈다.지금도 여주에는 정자를 비롯하여 이집의 은거에 대한 일화와 흔적이 남아있다. 이때 『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한 질문서를 보내 당시의 문사들을 경탄케 하였다. 천령현에서 자식을 가르치고 농사를 지으며 새 곡식이 나면 정몽주, 이색 등에게 보내주기도 하였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조선시대에 벼슬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건립한 광주(강동구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岩書院)에 제향되었다. 유고로『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이집 묘 하단부에는 1994년에 건립한 재각이 있다. 그리고 이 재각 옆에는 20대손이 거주하고 있다. 재각과 살림집은 교쇄가 뛰어나고 양지바른 곳으로 양택지로는 매우 좋은 길지다.

제각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약 100여미터 올라가면 묘역이 나타난다. 가장 상층부에는 이집의 묘가 있고 아래로는 손자 장손(長孫)과 그 아들 극규(克圭)의 묘가 있다.

이집의 묘는 성남시의 개발에 따라 이장된 것이다.
망주석은 특이하게 4각이며, 좌가 높이 144㎝, 우가 높이 142㎝의 소형이다. 매우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화려하지 않으며 마치 장난감 같다.
문인석은 복두(복頭)로 홀(笏)을 마주잡은 두 손은 관복 속에 넣고 있으며, 관복은 길게 발목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상기의 내용 대부분은 『광주이씨대동보(廣州李氏大同譜)』, 경기도에서 1990년 4월에 발간한『경기인물지 경기금석대관(京畿金石大觀』에서 발췌하여 정리했으며 성남문화원의 자료와 인터넷 성남시 문화재 자료에서 요약하고 발췌하였다. 또한 후손이 주신 자료에서 상당부분 인용하였다.

교쇄는 매우 좋은 편이다. 만약 혈판이 이루어지고 명당의 조건을 이루었으면 좌청룡이 매우 길게 뻗어 좋은 교쇄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그 형상이 변했으며 지금은 조금 답답하게 높은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이집의 묘 아래에 자리한 손자 장손(長孫)과 그 아들 극규(克圭)의 묘 역시 다를 바 없다. 이 두기의 묘역은 이집의 묘보다 기맥이 더욱 흐트러진 상태다. 산맥지지라 하나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묘역이고 선대의 조상이라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다.

묘역 하단 청룡 자락 안에 연못이 있다. 연못이 지나치게 탁한 황토물이다. 후손의 말을 인용하면 “오리가 날아들어 먹이를 찾느라 흐려놓는다”는데 좋지 않다. 예로부터 물은 재산으로 보아 묘역 아래 연못을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인공으로 조성한 작은 연못은 재물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물이 재물과 관련이 있다. 물은 깨끗해야 하고 흐리거나 탁하면 내장계통으로 병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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