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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광주이씨 시조비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2-28 조회수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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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주이씨 시조모

중부고속도로 이어지는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 상일 나들목. 이곳은 달리 하남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상일 나들목을 나서 우회전하는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덕풍동이 나타난다. 조금 더 가면 덩풍파출소가 나타난다. 파출소 앞 큰길을 따라 약 200여미터를 가면 우측은 아파트고 좌측으로 묘역이 나타난다. 이 묘역이 광주이씨 시조인 이당의 배위인 인화인씨의 묘역이다.

광주이씨의 시조는 이당(李唐)으로 고려말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흥지승람(興地勝覽)" 경기도 광주인물편에 의하면 그는 원래 광주출신 관리로 국자(國子) 생원(生員)에 올라 행실이 어질었으며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이씨 계파간에 시조에 대한 의견이 달라 우탄공파는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자성은 칠원에서 살아온 집안의 후손으로 신라 내물왕 때의 내사령(內史令)으로 서기935년 신라 패망시에 항복을 거부하고 고려 왕건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같은 이유로 준안(准安. 현 경기도 광주)으로 강제이주시켜 역리(驛吏)로 삼았고, 그래서 광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내물왕 부터 고려 때 까지 살았다면 600년간 살았다는 것이되므로 설득력이 없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광주이씨를 중흥시킨 조상은 이당의 아들로 고려 말의 학자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다. 그는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는데 공민왕 때 국정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을 논박하고 영천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살해된 후에 돌아왔다. 그의 세아들 이지직(李之直)은 형조참의를 지냈는데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이지강(李之剛)은 좌참찬, 이지유(李之柔)는 사간을 지냈다. 이지직의 아들 이장손(李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냈고, 이인손(李仁孫)은 세조 때 우의정에 이르고, 이예손(李禮孫)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이예손의 아들 이극기(李克基)는 참판을 지내고 성리학자이었다. 이중경(李重慶)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숙종 때 이조참판 이담명(李聃命)은 1690년(조선 숙종 16년) 영남 대흉년에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오성과 한음"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선조 때에 가문을 빛낸 광주이씨 가문의 큰별이다. 32살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이된 그는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중 체포되어 순국한 이수택(李壽澤), 을사조약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직한 이백래(李白來), 3.1운동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종훈(李鍾勳)등의 인물이 있다.
이러한 훌륭한 가문의 뿌리에는 인화인씨가 있다. 바로 시조인 이당의 부인이 바로 인화인씨인 것이다. 이당 배 인화이씨 묘갈(李唐 配 仁華李氏 墓碣)은 향토문화제 제7호로 지정되었다. 하남시 덕풍동에 위치하고 있는 이 묘갈은 전체높이 135㎝, 비신 119㎝, 폭 54㎝, 두께 16㎝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原文>
高麗生員 李朝贈吏曹判書李公諱唐之配五子文科 遁村先生諱集第居二 其後作文第登顯列者百四十餘人 右議政仁孫領議政克培左議政克均領議政浚慶領議政德馨著 外孫遍世多名德亦有 德興大院君 後孫昌夏龍翰得薦碣諸孫鳩財改其石修歲祀 前翊贊壽熙主其事正言基德記承旨光運書時 崇禎三甲戌生員公墓在永川

<번역문>
고려의 생원이자 본조(本朝=朝鮮)에서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당(李唐)의 아내로서, 5명의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둔촌선생 이집은 둘째 아들이다. 그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한 분이 140여명인데, 우의정 인손, 영의정 극배, 좌의정 극균, 영의정 준경, 영의정 덕형은 가장 드러난 분들이다. 외손으로서도 두루 세상에 명성과 덕으로 이름난 분이 또한 있었으니, 덕흥대원군이다.
후손 창하와 용한이 옛 비석을 얻고, 여러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그 비석을 고쳐 세워 세사를 모셨다. 전 익찬 수희가 이 일을 주관하고, 정언 기덕이 기록하였으며, 승지 광운이 글을 는데, 이 때가 숭정 이후 세 번째 갑술년(1754년, 영조 30)이다. 생원공의 묘소는 영천에 있다.

일문의 시족(始族)이니 말해서 무엇하랴만은 그 칭송은 참으로 대단하고 칭송하다 할 만활 것이다. 그러나 풍수적으로는 그 가문의 위대함과는 다를 수도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묘역 앞에 쓰여져 있기를 이 묘가 풍수적으로 길지라고 한다.
풍수를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이런 형상의 묘역이 명당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안타깝다.

풍수는 크게 음택과 양택으로 나뉘며 묘역을 판단하는 것은 음택이다. 음택에서는 용혈사수의 4가지를 살피고 판단하는데 용(龍)이 우선이고 수(水)가 마지막이다. 산이 먼저이고 물이 나중이라는 이론은 우리 풍수의 교과서다.
우선 용이 불규칙하고 노년기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기맥은 강한 산을 타고 강하게 흐르는 것이며 강한 기맥을 지닌 산에서 혈판이 이루어진다. 노년기 산의 형상을 지닌 산맥에서는 당판이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이루어진다 하여도 좋은 혈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혈판은 핵심이다. 혈판은 고유의 형상이 있으며 달리 강(岡)이라는 말로 표현되듯 둔덕형태가 있어야 한다. 이 형태는 마치 계란을 반으로 쪼개어 엎어놓은 형상이다. 인화인씨의 묘역에는 이 모든 것이 없다. 극단적으로 혈상이 나오지 않는다면 혈이 아니며, 혈이 이루어진다 히여도 그 가치는 이미 생각이하라는 것은 분명하다. 단적으로 인화인씨의 묘역은 형상이 없다.
중요한 것은 혈이 아닐 수도 있다. 인화인씨의 묘역은 풍수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일개 가문의 시조비 묘역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발복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문화재, 가문의 영광스러운 발자취로 보존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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