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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주 중앙공원의 문화재들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3-21 조회수 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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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중앙공원의 문화재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자리한 중앙공원은 마치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같다.
이곳에는 적지 않은 문화재가 방치하듯 세워져 있다.

예로부터 청주는 지세를 따졌을 때 무심천 위에 떠있는 배의 형상이라고 해서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한복판인 남문로2가에 서있는 용두사터 철당간은 그 배를 안정시키고자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중앙공원은 청주시의 한가운데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공원에는 선인들의 숨결이 서린 압각수와 충청도병마절도사 영문, 망선루가 있다. 병마절도사영문은 목조2층의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각지붕으로 유형문화재 제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앞에는 1천 년을 헤아리는 은행나무 압각수와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를 기리는 비와 한봉수의 송공비, 박춘무의 비 및 서원향약비 등이 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영문은 지방유형문화재 15호다. 병마절도사란 조선시대에 각 지방에 두어 병마를 지휘하던 종이품의 무관 벼슬이다. 병마절도사 영문 건물은 청주읍성 안에 있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營)의 출입문이다. 영문 앞에는 수령 1천년 가량의 은행나무가 서있다.

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남 해미현에 있었다가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겼다.
건물의 양식은 조선시대후기 병영이나 수영의 출입문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네모진 높은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으로 아래층의 중앙에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우물마루로 하고 계자난간을 돌렸다. 이 건물은 1988년까지 청녕각으로 오인되어 서원현감 이병정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병마절도사영문앞에 서 있는 압각수는 충북기념물 5호다. 중앙공원내에 수령이 약 9백년된 은행나무로 입모양이 오리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는 주장과 나무뿌리가 오리발처럼 뿌리사이가 붙어 있어 생겼다는 주장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때 무고로 옥에 갇힌 충신들이 큰 홍수를 만나 압각수에 올라 화를 면했다는 소식을 듣고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이들을 석방했다는 일화를 간직한 유서깊은 나무다.

망선루는 지방유형문화재 제 110호다. 본래 취경루라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관아의 부속 누정으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건축 연대와 사용용도는 알 수 없다. 원위치는 북문로 1가 현 청원군청의 북쪽, 옛 청주경찰서의 동쪽이나 일제때인 1921년에 무덕전의 신축으로 헐리게 되어 1923년에 김태희의 주선으로 현 위치인 제일교회로 이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때 개경이 함락되자, 왕은 왕비와 더불어 안동으로 파천하였다가 그 해 11월 청주에서 수개월 피신하고,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공민왕이 기뻐하여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를 행하고 합격자의 방을 이곳에 붙였다고 하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건물이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가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 그 후 목사 이섬과 이수득이 중수한 바 있다. 일제때는 청주보통학교의 교사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그후에는 청남학교와 세광고등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망선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목조기와 2층으로 중앙공원에 복원하였다.

조헌 전장기적비는 지방유형문화재 136호로 매우 큰 비석이다. 조선시대 의병장인 조헌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로, 임진왜란 당시 그가 승리를 이루었던 이곳 청주에 있다.
조헌은 명종 22년(1567)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데 힘을 다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병장 영규와 힘을 합쳐 청주성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왜적이 금산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를 거머쥐려 하자 승병장 영규와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적과 싸웠는데,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인원이 너무 적어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큼지막한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왜란이 끝난 후 숙종 36년(1710)에 비를 세웠으며, 김진규가 비문을 짓고, 이수당이 글씨를 썼다.

청주 척화비는 지방기념물 23호다. 1978년 10월 27일 충청북도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높이 108㎝, 나비 47㎝이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던 비다.

척화비의 내용은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는 말이다.이 척화비는 윗부분이 깨어져 洋자와 則자가 없어졌다. 1976년 2월 29일 석교동(石橋洞)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중앙공원에는 이 외에도 다양한 비석과 기념물이 있다. 공원의 특성상 관리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많은 시민들이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더욱 아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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