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하터널을 지나 고개를 돌아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 성하신당을 알리는 간판이 있다. 직진해서 계속가면 북면으로 가는 길이고 바다가 보이는 물길 옆으론 난 길을 따라가면 곧 개울가에 자리한 좁은 소나무 숲을 만나게 된다. 이 소나무 숲 속에 작은 집이 하나 있다. 울릉도에서 보기드문 제각 형태다. 한눈에 보아도 이곳이 태하리 성하신당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담으로 둘러쳐진 안으로 들어서니 한 채의 신당과 안내판이 있다.
성하신당의 유래는 슬픈사연이다. 조선 태종(1137년)당시 삼척인 김인우는 울릉도 안무사를 명받아 울릉도 거주민의 소환을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동에 도착하여 관내 전역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출항을 위해 잠을 자던 중이었다. 해신이 현몽 하여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고 했다. 안무사는 본국 귀환을 위해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섬에 남겨두고 무사히 본국으로 귀착했다. 수년 후 재차 울릉도 안무의 명을 받고 태하동에 도착하여 수색을 하였던 바, 전년에 유숙하였던 곳에서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되어 있었다. 안무사는 동남동녀의 고혼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곳에다 간단한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고 귀임하였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풍어와 풍년을 기원하고 선박의 진수가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서 제사하여 해상작업의 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풍수는 문화로 해석하여야 한다. 이러한 신당이나 무속적 요소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에 전해지는 것이다. 성하신당의 경우에도 울릉도에서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문화인 것이다. 또한 풍어를 빌고 풍년을 비는 행위로 승화되었다는 것은 단순하게 보아서는 일종의 제례의식으로만 보여지지만 크게 보아서는 진압풍수와 비보풍수의 개념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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