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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익 묘역에 그려진 벽화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4-22 조회수 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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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밀양에서 24번 도로를 탄다. 사적 459호로 지정된 박익의 묘역.
밀양에서 12킬로정도 동산 3거리를 지나자마자 곧 오른쪽으로 작은 도로가 나타나고 입구에 밀양고법리박익벽화묘 (密陽古法里朴翊壁畵墓)를 알리는 간판이 나온다.
바라보니 산 중턱에 산소가 훤하게 보인다.
마을 안쪽으로 제각으로 보이는 집이 있다. 박익의 제각이다.
산 중턱을 오르니 산소가 있다. 산을 오르기에 좋도록 넓게 다듬어 놓았다. 묘역의 정비도 비교적 잘 되어 있다.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산 134내에 자리한 묘역은 내부에 벽화가 그려진 것으로 유명하다. 밀성박씨 묘역의 능선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는 석인상, 갑석, 호석을 갖춘 방형분으로서, 봉분은 가로 6m, 세로 4.8m, 높이 2.3m이며, 내부 석실(길이 .5m, 폭 1m, 높이 0.8m)의 사방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묘의 축조수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수도(隧道)를 갖춘 방형묘라는 점이다. 방형묘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일정 계층에서 유행한 묘제 중 하나이나, 남쪽으로 수도를 설치한 것과 병풍석이 경사지게 설치된 것은 특이한 경우다. 조선전기의 횡구식 석실 중 수도가 확인된 것은 아직 없으며, 묘도와 구(溝)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양식상의 원류에 대한 검토 자료가 된다.
벽화는 화강암 판석 위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먼저 검정선으로 벽화내용을 소묘한 뒤 마르기 전에 주요부위를 적·남·흑색으로 채색하는 프레스코기법으로 그려져 있으며, 부분적으로 퇴락되어 있으나 잔존부분에는 인물, 말, 도구 등 당시의 생활 풍속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찾아간다고 해도 벽화를 보기는 어렵다. 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후손의 말씀에 의하면 이곳의 벽화가 많이 훼손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도굴범에 의한 것이라 했다. 2000년도 태풍으로 훼손된 묘역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정밀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부산동아대에서 벽화를 연구하여 보고서와 연구자료를 내놓았다.
이 묘역의 주인은 박익(朴翊)선생이다.
송은(松隱)박익선생(1332∼1398)의 휘는 익(翊),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본관은 밀성으로 고려말의 문신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소감(少監), 예부시랑(禮部侍郞), 세자이부중서령(世子貳傅中書令)을 역임하고 한림문학이 되는 등 고려말 팔은(八隱)중 한 분으로,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송은집(松隱集)」이 있다.
벽화 발견에 의한 조선초 생활 풍습의 연구 등 고고학적 또는 회화사적 가치 외에 지석(誌石)의 출토로 고려말 문신인 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에 대한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은 박익 벽화묘는 2000년도 태풍으로 훼손된 묘역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정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 가치가 새롭게 밝혀져 2005년01월26일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부산 동아대박물관은 2000년 10월, 박익선생의 묘를 정식 발굴한 결과, 무덤안 석실 남쪽과 북쪽 벽면 가장자리 4곳에서 매죽(梅竹)벽화를 발견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미 많은 양의 벽화가 확인된 후의 일이다. 이는 고려말 충신인 박익의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의 표시로서 태조 왕건왕릉에서 발견된 이후 좀처럼 발견되지 않던 세한삼우(歲寒三友) 매죽송(梅竹松)화의 맥을 잇는 것이다. 또 관(棺) 안쪽 바닥에서는 문양이 발견돼 박익이 조선 건국 6년 뒤에 사망했으나 그의 내세관은 유교가 아닌 불교를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박익 벽화묘 출토 유물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결과 목관은 옻칠을 한 소나무를 재료로 했으며, 목관 표면 범자 명문에 쓴 흰색 안료는 순은(純銀)으로 드러났다.

박익을 기리는 사당으로 경남 청도의 용강서원, 밀양 덕남사, 산청 신계서원, 거제도 송령사가 있다.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그의 사당이 있는데, 독특한 것은 그 사당에 모두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박익의 후손인 박대성 화백이 그린 초상화로 통일됐지만, 그 이전에는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른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사당엔 위패만 모셔져 있기 쉬운데 박익의 경우처럼 초상화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묘사한 화상시(畵像詩)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화상시는 박익과 동시대에 살았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그리고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초상화를 보고 정몽주가 먼저 운을 뗐다.

긴 수염 십 척 장신 잘도 그렸네(畵出長髥十尺身)
볼수록 두 얼굴이 참으로 똑같네(看來尤得兩容眞)
세상 이치가 자취 없다고 말하지 마소(寞言公道無形跡)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되겠네(死後猶存不死人).”

정몽주는 박익과 박익의 초상화를 나란히 보고서 이 시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자리에 길재와 변계량도 함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봉황의 눈, 범의 눈썹, 십 척 장신에(鳳目虎眉十尺身)
담홍 반백의 두상이 참으로 똑같네(淡紅半白兩相眞)
그림으로 선생 얼굴 살펴보니(畵圖省識先生面)
그림 속에도 죽지 않을 정신 그려져 있네(不死精神影裏人).

이렇게 읊은 길재는 박익보다 21살이 어려서 박익을 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밀양 한 동네 출신으로,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변계량도 시를 남겼다.

풍후한 얼굴 덕스러운 몸매(豊厚形容德有身)
아무리 보아도 하늘이 내린 분이네(看看優得出天眞)
눈 덮은 긴 눈썹, 무릎에 드리운 수염(眉長過目髥垂膝)
그림과 사람 마주해도 분별하기 어렵겠네(兩對難分影外人)

묘는 마을 안쪽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산진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마치 마을을 굽어보는 듯한 모습인데 앞이 제법 넓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리에서 산이 에워싸고 있어 앞이 터진 곳은 아니다.
박익 묘 부근에는 여러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하단부의 묘는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뒤쪽의 묘 한기는 제법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익의 묘가 장방형의 석재를 이용한 묘인 것으로 봐서 뒤쪽의 묘는 약간 무너지기는 했으나 전체를 돌로 쌓은 적석총 비슷한 모양이다. 그것으로 보아 뒤쪽의 묘가 더 오래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박익의 묘는 능선상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장승생기(葬乘生氣)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용이 지나치게 넓다. 용이 지나치게 넓으면 응결(凝結)이 어려워 혈을 결지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나치게 경사가 심하다. 용이 넓어도 혈이 결지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용이 넓고 경사가 심하면 역시 결지와는 인연이 없다. 경사가 있다 하더라도 멈추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박익의 묘역 부근은 그러한 변화가 없다.
마지막 관산 주안점으로는 묘역 상부의 입수룡이다. 입수를 찾아 올라가며 묘역 상부를 살피게 된다. 음택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과 혈이다. 용이 이루어지고 정밀하며 기맥이 있어야 혈이 결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박익묘 상부의 용맥은 마치 닭이 훼를 쳐놓은 듯 흩어지고 이리저리 갈라지니 동차서예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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