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 판부면 금대리에 위치한 영원산성은 치악산(해발 1288m)에 위치한 돌로 쌓은 산성이다. 산성의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가장 큰 지방 세력이었던 북원의 양길, 궁예와 관련되어 있는 사적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고려 충렬왕 17년(1291) 원충갑(元沖甲,1250-1321)이 지역의 방위군과 합단의 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의 지휘 아래 원주 일대의 주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되어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후 한동안 한강 상류의 진지로 쓰이다 폐허가 되었다.
거란의 후예 합단(哈丹)은 고려 충렬왕(1291)년때 침입하였다. 지방 주현군인 원주의 별초군 향공진사 원충갑은 남대봉서쪽 영원사 위에 있는 영원산성에서 병사 5-6명을 거느리고 4차례 합단군공격을 격퇴하여 적의 목을 많이 베고, 50여명의 포로를 잡아 추성분 용광국공신이 되어,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원주 영원산성은 학술적으로는 중세 산성의 특징(여장, 치성, 성문 등)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며, 역사적으로는 고려·조선시대를 걸쳐 전란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귀중한 유적이다.
영원산성에서 적을 물리친 장수중 으뜸이라면 역시 원충갑 장군일 것이다. 원충갑은 고려의 무신(武臣)으로,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원주사람으로 체구는 작으나 정력이 넘쳐 날쌔었고 눈동자가 번개처럼 빛났으며, 위험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았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별초(原州別抄)에 있으면서 1291년(충렬왕 17) 합단적(哈丹賊)이 치악성(雉岳城)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때 결사대 중산(仲山),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 별장(別將) 강백송(康栢松), 원주(原州) 아전(衙前) 원현(元玄) 등 다수의 사람과 힘을 합쳐 물리쳤다. 이로부터 합단적은 예봉(銳鋒)이 꺾이어 감히 공격도 노략질도 하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에서도 굳게 방어하게 되어 비로소 합단적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는 모두 원충갑에게서 얻은 힘이었다.
원충갑의 이러한 공로로 원주는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다시 1308년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되었고,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賦役)과 잡공(雜貢)이 3년 동안 면제되었다. 원충갑 또한 여섯 번 전임(轉任)하여 삼사(三司) 우윤(右尹)에 올랐다. 충선왕(忠宣王) 때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이 되었고, 합단적을 물리친 공으로 1319년(충숙왕 6)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이 되었다.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치악산 영원산성 안에 원충갑사(元 甲祠)가 세워져 제사를 모시다가 1669년(현종 10) 사당을 세워 원충갑을 주향(主享)하고 김제갑(金悌甲)과 원호(元豪)를 배향(配享)하였고, 1670년(현종 11) 윤2월 7일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충렬사는 1871년 철거되어 사액 현판은 괴산 충민사로 옮겨졌다. 묘소는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있다.
원주 문막 부근에는 간현유원지가 있다. 간현리마을에서 약 2킬로를 가면 마지막 마을 앞에 장군의 묘역을 알리는 간판이 있다. 장군의 묘역은 섬강이 빙글 돌아 에워싼 형국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앞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섬강이 흐르고 있다.
210미터 높이의 월림산은 재미있는 산이다. 강으로 둘러싸여 섬강과 마주 닿아 있는데 산맥은 지정면 방향에서 발원한 것이다. 묘역 뒤로 물이 보이면 당배수(撞背水)일 가능성이 있는데 주산이 높아 그럴 염려는 없다.
눈여겨 볼 것은 혈심이다. 유혈의 혈상을 지니고 있으며 좌선으로 보인다. 우측으로 과협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좌선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조금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우선의 끝지점에 뻗어나간 지각이다. 이 지각에도 대좌형의 혈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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