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산 47-1 경앙사. 오정방고택이 있는 마을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찾기도 어렵지 않다.
경앙사(景仰祠)는 1964년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선생의 문인들이 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춘제(春祭)를 드리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석농 오진영 선생과 그의 스승인 간제 최규서 선생과 노주 오희상 선생 등 세분을 모시고 있다. 현판 액자는 석농(石農)의 제자인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선생이 썼다. 건물의 총건평은 8평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현판 액자는 석농(石農)의 제자인 월헌(月軒) 이보림(李普林)선생이 썼다는데, ‘경앙’은 “高山仰止 景行行止 산은 사람을 우러러 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 만인에게 존경을 받는다”라는 의미이다.
이곳에 모셔진 오희상(1763 ~ 1833)의 자는 사경(士敬),호는 노주(老洲), 시호는 문원공(文元公),본관은 해주(海州)이며, 대제학 재순(載純)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고, 1800년(정조24)에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가 되었으며, 황해도절도사 등을 지낸 뒤 1818년(순조18) 광주(廣州)에 은거하였다. 이 동안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과 이이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별세 후 헌종7년(1841)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서수기 讀書隨起》, 《노주집 老洲集》등이 있다.
전우(1841 ~ 1922) 선생의 자는 자명(子明),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21세가 되던 해에 임헌회(任憲晦)를 찾아가 직접 사제의 의를 맺고 그가 죽을 때까지 모시고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68세 되던 해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등도 군산도 등에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고, 지금의 부안 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아가면서 학문을 폈다. 72세 되던 해에 계화도에 정착하고,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라 부르면서 82세에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의 성리학의 연구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경앙사 외에도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재집 艮齋集》60책, 《간재사고 艮齋私庫》30책, 《추담별집 秋潭別集》2책 등이 있다.
오진영(1868 ~ ?) 선생의 호는 석농(石農),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오희상의 후손으로 양성면 덕봉리에서 출생, 성장하였다. 1887년(고종24) 19세에 스승 전우를 처음 만났고, 1898년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후 오진영은 스승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학문을 계승 실천한 대표적인 문하인이다. 그는 엄격한 도학적 태도를 견지한 성리학자로 국가의 독립과 망국의 군주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하였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이수홍(李秀洪)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공한을 보내는 문제를 상의하자 스승의 허락을 얻어 스승을 대신하여 독립청원공한을 지었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쫓아 독립운동의 참여에는 대단히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우의 문하인 대다수가 그러하듯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의 묘소는 양성면 덕봉리의 종산에 있다.
경앙사는 배산임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안정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경앙사가 사당이기는 하나 양택지로 매우 좋은 곳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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