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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평택의 큰절, 심복사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5-31 조회수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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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심복사(深福寺)는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275번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평택은 지형이 평탄하기 때문인지 대찰이 많지 않다. 만기사가 대찰이기는 하지만 아주 큰 사찰은 아니다. 심복사도 대찰에 속하지만 아주 큰 사찰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자락에 자리한 심복사는 육지쪽으로 솟아있는 산을 등지고 멀리 바닷가 방향을 바라보는 형국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계곡의 입구가 약간 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보면 배산임수 법칙에 의해 지어진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심복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적광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상이 9~10세기 양식을 보이므로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파주의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져 봉안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16세기에 해당하는 명문기와가 있고, 18·19세기의 다른 기록도 있으므로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법통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가람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산신각과 2동의 요사, 삼층석탑 등 비교적 단출한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산신각은 한 칸짜리 작은 건물로 내부에는 최근에 조성한 칠성탱·산신탱·독성탱을 봉안하고 있다. 요사로 사용하고 있는 내원당(內院堂)은 대적광전 아래에 위치하는데, 이곳이 본래의 법당자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적광전 오른쪽에 있는 요사는 편액은 없지만 향림당(香林堂)이라고 부른다. 한편, 절 경내 왼쪽에는 곡부 공(孔) 씨의 재실(齋室)인어촌재(漁村齋)가 있다.

심복사에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파주 문산포에 천문을(千文乙)이라는 어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이곳 덕목리 앞 아산만에 이르게 되었다. 고기잡이에 열중하고 있던 중 그물에 무엇인가 걸렸다. 그물을 당겨보니 큰 돌이었다.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다시 바다에 그물을 던졌다. 얼마 후 그물에는 또 무엇인가 걸린 듯하였다. 건져보니 이번에도 돌이었다. 이상히 여겨 살펴보니 그것은 불상이었다.

깊은 불심을 지니고 있었던 어부는 부처님 앞에 여러 차례 절을 올렸다.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디든지 모셔야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절터를 찾아 근처 고등산으로 향하였다. 이상하게도 등에 지고 있는 부처가 새털같이 가볍게 느껴졌다.

얼마쯤을 왔을까.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던 부처가 갑자기 무거워지며 발길을 옮겨놓을 수가 없었다. 어부는 이곳이 부처님을 모실 곳인가 보다 생각하고 그곳에 모시기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어부에게는 걱정이 있었다. 부처님을 모시자면 당연히 법당이 있어야 하는데 나이 든 혼자의 몸으로 어떻게 불사를 한단 말인가. 걱정을 하다가 늦게야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어부는 꿈에서 부처님을 만났다.

“걱정하지 말거라. 바닷가에 나가 보면, 난파된 배가 있을 것이니 그 재목을 써서 건물을 짓도록 하고, 또한 바닷가에는 검은 소가 있을 테니 끌어다가 법당을 짓도록 하여라.”
잠시 동안의 일이었지만, 그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어부는 날이 밝자마자 바닷가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난파된 배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멀리 검은 소 세 마리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어부는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꿇어 절을 올리고, 그 재목을 가져다가 불사를 하고, 바다에서 건진 부처님을 모셨다. 이 절이 지금의 심복사라고 한다.

내원당 아래쪽 주차장에 석주(石柱) 2기가 있다. 본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누각의 초석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2기 중 왼쪽 것에 1705년(숙종 31)에 해당하는 연호와 시주, 화주, 석공의 이름이 적혀 있다.

내원당 쪽에서 대적광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맨 위 왼쪽에 석인상(石人像) 1위가 있다. 석인상은 절에서 봉안하지 않으므로 본래부터 절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무덤 앞에 세우던 석인, 또는 장승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관을 쓴 듯하며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이 큼직큼직하게 조각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110㎝, 얼굴 너비 30㎝, 어깨 너비 47㎝이다. 혹시 이 석인은 불가의 영역을 포시하는 망부석이나 장승의 역할을 하던 것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심복사의 주불전은 대적광전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정면과 측면 각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본래의 명칭은 능인전이었으나, 1990년 개축하면서 대적광전이라 고쳤다. 전에 있던 능인전(能仁殿) 편액은 지금 내원당에 걸려 있다. 전각 내부의 포작(包作)에 그려진 포벽화로는 가섭, 아난, 목건련 등 부처님의 10대제자를 비롯하여 여러 존자(尊者)들을 그렸다. 그리고 외부 벽화로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八相圖)가 있고, 그 밖에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대적광전은 내부의 주불이 비로자나불이라는 의미이다. 보물 제 565호로 지정된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바로 이 대적광전의 주불이다. 이 석불좌상은 왼손을 밑으로 지권인을 결한채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좌상이다. 굵고 낮은 육계를 한 갸름한 얼굴, 짧은 목과 단정한 어깨, 좁은 무릅폭을 갖추고 있으며, 대체로 온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에 걸친 법의는 가슴이 노출된 통견의로서 반원꼴의 화문이 조각된 굵은 옷깃이 특징적이며, 양팔과 무릅 위에서 도식적인 평행밀집식 옷 주름을, 양 무릎 사이에는 부채꼴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 불상은 비교적 볼륨감이 있고 단정한 모습의 우수한 상으로 경기도에서는 드물게 보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이다.

대적광전 정면에서 오른쪽 우측의 산을 바라보면 아직 단청이 되지 않은 당우가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면 현판도 없는데 문을 열어보면 산신각임을 알수 있다. 제법 높은 위치에 있고 생지에 있어 가장 좋은 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는 심복사의 전면이 모두 보인다.

심복사는 교쇄가 잘 이루어진 사찰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닷물이 보이게 되겠지만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외백호가 길게 뻗어나와 앞을 가리고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 이곳의 지세가 열렸다고 생각했는지 사찰의 수구 방향에 수구막이로 나무를 심었다. 오래전 일은 아닌 듯 서양의 메타세콰이어를 심었다. 속성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생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무다. 느티나무를 심는 지혜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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