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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홍이상 묘역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6-20 조회수 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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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고양은 일대가 태백산령과는 거리가 먼 서해안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인지 높은 산은 많지 않다. 이중에서 고봉산(高峰山)은 일산동과 성석동 사이에 위치한 산(해발 208M)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기 서로 각축을 벌이던 곳으로 일명 테미산으로도 유명하다. 일산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인근에 홍이상 묘, 어세공 묘 등의 문화재가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달을성현으라 불리우고,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산 정상에서 고양시 대부분 지역을 조망할 수 있으며 약수, 성터 그리고 고목, 만경사 등 다양한 볼거리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늘 등이 있다.

성석동 진밭마을에서 일산동으로 넘어가는 도중, 길가에 홍이상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묘소에서 약 150미터 아래 지점에 있는데 인조 8년에 건립되었다. 현재 화강석의 귀부는 작은 평형으로 마멸이 심한데 이수는 조각이 정교하고 뚜렷하게 볼 수 있다.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이현이 썼으며 김상용이 전을 하였다. 묘역은 길을 따라 150미터 올라가면 잘려진 용맥 상에 있다.

홍이상의 묘역과 신도비는 향토 유적 제 13호다. 묘는 성석동 성동 고봉산 기슭에 남향하여 있다. 일산에서 가장 높은 산, 즉 주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배 증정경부인 안동 김씨의 봉분과 쌍분을 이루었는데 봉분의 둘레는 각 15m이고 높이는 240cm이다. 묘 앞에는 봉분 앞으로 이준이 찬한 묘비가 있고,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크게 4칸의 단차를 두고 있는데 홍이상의 묘는 두 번째 단차에 자리하고 있으며 언뜻 보아서는 대좌형의 유혈에 가깝다. 그러나 지나친 인작이 가해졌으므로 판단이 쉽지 않다.

홍이상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4년에 출생하여 광해군 7년에 돌아갔다. 처음 이름은 인상이며 자는 원례, 또는 군서이다. 호는 모당이며 본관은 풍산으로 수의 아들이다 고양 팔현의 한사람인 행촌 민순의 문인으로 선조 6년 사마시를 거쳐 6년 뒤 신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와 호조 좌랑, 파랑을 거쳐 정언 수찬, 지제교를 거쳐 병조 정랑을 지냈다. 사가독서를 한 후에 교리,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 왕을 평양까지 호종하였으며, 병조참의에 전임되었다. 후에 당파에 염증을 느끼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송도에서 돌았다. 시호는 문경이며, 저서로는 모당유고가 있다. 고양의 문봉서원에 제향된 고양팔현의 한사람이다.

지나친 인작이 가해져 원래의 기맥이나 애초의 특징이나 지각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다. 어느정도의 인작은 파악이 어렵지 않은데 홍이상의 묘는 물론이고 주변의 모둔 묘역들도 파악이 쉽지 않다.

특히 눈에 뜨이는 묘역은 홍이상 묘역 아래의 홍상(洪霙)의 묘다. 이름도 특이한 한자를 사용한 것 같다. 홍상의 자료는 얻기가 어렵다. 홍상(1584(선조17년)-1645(인조23년)은 풍산(豊山)사람으로 자는 택방(澤芳) 호는 추만(楸巒)이다. 선조38년에 생원시합격, 음보로 사산감역 형조좌랑역임. 광해군13년에 문과급제. 공조참판 동지중추부사역임하였다.

연안이씨 월사 이정구의 부인은 두 딸을 두었으니, 큰 딸은 풍산 홍씨 홍영(洪霙)에게 시집가, 홍영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에 오르고 그 아들 주원(柱元)은 정명공주(貞明公主: 선조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져서 풍산 홍씨의 대 벌열(閥閱)을 이룩한 단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눈여겨겨 볼 묘는 홍상의 묘다. 비록 인작이 가해졌다고는 하나 입수룡 방향에서 바라보면 홍상의 묘는 완연하게 혈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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