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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기

제목 성현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6-27 조회수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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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문산 입구에서 내포4리로 들어가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면 안골마을이 나타난다. 부근에는 창녕성씨의 세천지가 있는데 우리가 역사서에 볼 수 있었던 많은 인물의 묘가 있곳에 몰려있다. 특히 성현(成俔, 1439∼1504)의 묘가 있는 우측의 세장지에 눈이 간다.

성임의 묘에서 바라보면 건너편에 제법 잘 짜여진 묘역이 보인다. 신도비가 그럴듯하게 서 있고 뒤로 산길을 오르면 곧 묘역이 나타난다. 산 능선을 따라 여러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최상부에 성현의 묘가 있다. 문산읍 내포리 산 60-1번지에 자리한 용재 성현의 묘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2007년 현재 아무런 안내판이 없다. 지난해에 들렸을 때도 역시 문화재 간판이 없었다.
“용재 총화”를 지은 성현의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염조(念祖)이고 성임(成任)의 아우가 된다. 가까운 곳에 성임의 묘가 있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인근이 모두 창녕성씨의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성현은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 29세로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수찬, 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147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ㆍ대사간 등을 지내고 1485년 첨지중추부사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 대사성, 동부승지, 형조참판, 강원도관찰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후 동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임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아지자 한 달 만에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유자광(柳子光)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다. 한편,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뒤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에 『용재총화(용齋叢話)』를 저술하였다.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에 속하는 책으로 10권에 이르고 1525년(중종 20)에 경주에서 간행되어 3권 3책이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이,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간행한《대동야승 大東野乘》에 채록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성현은 폭넓은 학식과 관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정리하였다.
그 내용은 고려로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 변화된 민간풍속이나 문물제도, 문화, 역사, 지리, 학문, 종교, 문학, 음악, 서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다루고 있어, 당시의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제일 먼저 우리나라의 유학에 관하여 논하여, 정몽주(鄭夢周)와 권근(權近) 등 경학(經學)의 대가들이나 최치원(崔致遠)·정지상(鄭知常) 등 신라와 고려의 명현(名賢)과,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등 조선 초기의 문인들의 학문적 특성과 문장가로서의 성격을 풀이하고 있다. 한편 필법에 대하여도 언급하여 김생(金生), 이용(李瑢) 등의 특징을 이야기하며 고려의 공민왕으로부터 조선 안견(安堅)의 산수화에 이르기까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음악에 대해서는 신라의 현금(玄琴)이나 금관국(金官國)의 가야금 및 송태평(宋太平), 도선길(都先吉) 같은 악공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각 도읍의 형세와 명승지를 언급하고 있다. 풍속에 있어서는 잔치음식의 가짓수와 맛의 특징 등을, 그밖에 나례(儺禮), 처용무(處容舞), 관화(觀火) 등의 절차를 설명하고 있어 귀중한 민속학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도 중국사신의 접대에 따르는 의식절차, 사신들에 대한 인물평, 과거제도에 대한 것과 성균관의 제도, 제사풍습, 불교와 승려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 설정에 있어서는 왕세가(王世家)의 양반관료는 물론이고, 유학자, 서화가, 음악인, 문인 또는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과부나 중·복서(卜筮), 기생, 심지어 탕녀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유명인들의 일화나 해학담(諧謔譚), 일반 대중이나 천인들의 소화(笑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특히 민속학이나 구비문학 연구의 자료로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저서로『허백당집』,『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등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성현 묘역은 정남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봉분2기, 묘갈 1기, 상석 1기, 향로석 1기, 문인석 2기가 배치되어 있다.

주산(主山)에서 이어진 용맥이 성현의 묘역 청룡자락을 이루고 있다. 성현의 묘는 청룡에 붙어 있듯 조성되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앞쪽이 전순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이치로 보아 기맥의 흐름을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전순이 확인되고 기맥과 닿아있을 경우에는 잉혈의 응결 여부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러나 기맥의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고 형태가 애매하기 그지없다.

성현의 묘역 청룡자락에는 2단에 걸쳐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무런 비석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산자락 마지막의 묘역이 매우 뛰어나다. 그렇다고 매우 격이 높은 것은 아니며 응결이 이루어진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한 자락 건너 외청룡에 해당하는 능선상에도 여러기의 묘역이 있는데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묘역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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