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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허준선생의 묘
작성자 박상근 등록일 2007-06-27 조회수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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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자유로를 타고 두포로타리에서 직진하여 임진강으로 향하면 곧 전진교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부터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가지가지 어려움을 격고 나서야 겨우 통과를 할 수 있었다. 사재 김정국의 묘도 찾으려고 무척이나 노력을 했으나 결국은 찾을 수가 없었다. 허준의 묘는 간판도 잘 정리되어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전진교를 건너 우회전하여 계속 들어간다. 곳곳에 허준 선생의 묘역을 알리는 간판이 있어 그리 어렵지도 않다. 월성부대를 지나고 곧 1킬로미터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은 동파리 수복마을이고 우측으로 허준선생의 묘를 알리는 간판이 나타난다. 약 1.5킬로미터를 가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의(名醫)로 알려진 허준(許浚 1539∼1615)선생의 묘가 나타난다.

민통선 안에 이토록 잘 정비된 곳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차를 세우고 약 200여미터를 걸어 올라가는데 길이 잘 정리되어 있다. 올라가면 오른쪽에 새로 지은 제각이 나타나고 정면에 묘역이 보인다.
상부에 1기의 묘가 있고 아래층에 2개의 묘가 하나의 묘역을 이루는데 반이나 잘려 사라져버린 비석이 보인다. 바로 허준의 묘다. 바로 이 비석 때문에 허준의 묘역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허준 선생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字)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岩)이다. 용천부사(龍川府使)를 지낸 허론(許論)의 서자(庶子)로 김포(金浦)에서 출생하여 당대의 명의인 유의태(劉義泰)의 문하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유의태는 후대사람이라는 의견이 많으므로 이는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선조(宣祖) 7년(1574) 내의원(內醫院) 취재(取才)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혜민서(惠民署) 봉사(奉事)를 거쳐 전의(典醫)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어의(御醫)로서 왕을 의주(義州)까지 모셨으며 1604년 충근정량호 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3등이 되었고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지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어 의인(醫人)으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1608년 선조가 승하(昇遐)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光海君) 원년 (1609)에 다시 복직되었다. 저서로는『동의보감(東醫寶鑑)』,『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등이 전한다. 광해군 2년(1610) 16년의 연구 끝에 이루어진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청나라 등지 에서도 간행 보급되어 조선의학 내지 동양의학의 성전(聖典)이 되었다.

선생은 우리나라가 낳은 대표적인 명의(名醫), 의학자로서 한의학(韓醫學) 중흥의 거봉(巨峰)이자 동양의 의성(醫聖)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별세 후 숭록대부에 추록(追錄)되었다. 그 동안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되었다. 묘역은 약 50평의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로 추정된다. 이들 두묘 위에 허준선생의 생모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한개 더 있다.

묘소에는 묘비(墓碑), 문인석(文人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쪽으로 파손되어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원비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陽平(君) (扈)聖功臣 (許)浚』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선생의 묘인 것이 확인되었다.

허준의 가장 큰 업적은 동의보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의 편찬 목적은 임진왜란으로 전국토의 대부분이 황폐하여 병자가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없는데다가 의서마저 부족하였고, 의원과 의서는 있으나 일부 의원들이 처방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약을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선조는 허준 등에게 새로운 의서의 편찬을 명하였다. 이에 허준은 의원으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하여 이 책을 편찬하게 되었다.

동의보감은 선조29년(1596) 태의(太醫) 허준(許浚)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撰集)할 것을 명하여, 허준은 이 왕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鄭澯: 1533∼1603), 태의(太醫) 양예수(楊禮壽: 1520경∼1597),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찬국을 설치한 후 찬집(撰集)을 시작하여 상당한 진척을 보았으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으로 여러 의가(醫家)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기에 편찬 작업이 한때 중단되었다.
난(亂)이 끝난 다음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내장방서(內藏方書) 500여권을 내어주어 자료로 하도록 하며 단독으로 편찬을 명하자, 허준은 이에 10여년에 걸쳐 집필하여 광해군 2년(1610) 8월 6일에 25권25책으로 완성하였다. 그리고 저술을 완료한지 3년 후인 1613년 12월에 내의원에서 완간(完刊)하였고, 그 이듬해 4 월에 오대산과 태백산 사고 등에 내사된다.
허준은 집필기간 동안인 1608년 3월 17일부터 이듬해 11월 22일 광해군의 방환(放還) 명령이 있기까지 유배 생활을 하며 동의보감 저술을 지속한다. 당시 허준의 유배지가 어딘가는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허준에 대한 광해군의 총애와 비호가 있었고, 문외(門外) 출송(黜送)이라 한 것을 보아 일단은 도성(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유배를 보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간이 최립(1539∼1612)의 <간이집(簡易集)>에 수록된 유배가 풀린 허준을 송별 하며 지은 칠언시 "증송동경태의허양평군환조자의주(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를 참조해 보면 허준은 문외 출송에서 다시 멀리 의주로 유배되어 갔었음이 확인된다.
동의보감은 목록이 上·下卷(제1책∼제2책), 내경편(內景篇)이 권1∼권3(제3책∼제6책), 외경편(外景篇)이 권1∼권4(제7책∼제10책), 잡병편(雜病篇)이 권1∼권11(제11책∼제21책), 탕액편(湯液篇)이 권1∼권3(제22책∼제24책), 침구편(鍼灸篇)이 권1(제25책)로 되어 있다.
즉, 이 책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의 5대 강목(綱目)으로 나눈 후, 각강(各綱)이 류(類)에 따라 항(項)을 예기(例記)하였으며 각항(各項)의 류를 다시 목(目)으로 나누고 각 항목(項目)의 다음에는 그 항에 해당하는 병론(病論)과 방론(方論)을 빠짐없이 채록(採錄)하였고, 또 그 출전(出典)을 밝혀 각병증(各病症)에 관한 고금의 치방(治方)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하였고, 곳에 따라서는 속방(俗方)이나 자기 의 경험방을 적기도 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각 병증의 항목을 주로 증상을 중심으로 하여 열거하며, 병항(病項)에 따르는 치방을 출전과 함께 일일이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여러 가지 의 서들을 참고로 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한 현대의 임상의들이 손쉽게 고금 의방을 볼 수 있는 편의성을 준다. 이렇게 <동의보감>은 1212종의 약에 대한 자료와 4497종의 처방을 수록하고 있 다. 그리고, 탕액편(湯液篇) 3권3책은 향약명(鄕藥名)이 한글로 637개가 등재되어 있어 국어연구의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되고 있다.
동의보감에는 중국의 후한남북조시대(後漢南北朝時代)로부터 수, 당, 송, 원, 명 에 이르기까지의 83종에 달하는 중요한 방서(方書)들이 거의 인용되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방서로는 세종조의 <의방유취(醫方類聚)>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그리고 선조 조에 양예수 등이 편저한 <의림촬요(醫林撮要)> 등이 채용되어 있다. 따라서 <동의보감> 저술에 모두 86종의 방서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서의 사용 이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내의원에 소속된 의원들의 경험도 참고되었다는 사실이다.
동의보감은 여러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과거로부터 내려온 당시 의학의 일부 비현실적인 이론 부분을 배격하고 실용성을 중요시하여 과학적 입장에서 당시 의학의 모든 지식을 정리하였다.
둘째, 우리 국토에서 나오는 향약(鄕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이용과 보급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해 향약 중 637개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쉽게 이용토록 함으로써 조선의학을 부흥시켰다.
셋째, 86여종이 넘는 많은 국·내외 의서를 참고하여 편찬하였으므로 내용이 풍부하여 시간적 여유가 없는 임상의(臨床醫)에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넷째, 당시 조선의학의 수준을 중국과 일본에 과시하였다.
다섯째, 허준은 조선의학을 하나의 독립된 의학이라는 의미에서 이 책의 이름을 < 동의보감>이라 명명(命名)하였다. 그는 중국의학을 북의(北醫)와 남의(南醫)로 나누고 조선 의학을 동의(東醫)라 하였는데, 이는 조선에서도 독자적으로 의학을 연구·발전시켜 왔으며 조선 의학이 중국과 대등한 전통과 수준을 지니고 있음을 주체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서명(書名)인 것이다.
-- 상기 내용은 이충휘 선생의 사이트 [향토문화 자료실] . HTTP://HYANGTO.PE.KR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허준의 명성은 하늘을 가리고 손바닥을 칠 정도이나 그의 죽음 후에는 그다지 영화롭지 못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풍수적으로 그의 묘역이 혈이나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하자고 함이다.
우리는 간혹 유명한 조상이나 역사적으로 선지자적인 명성을 지닌 인사의 묘역은 당연하게도 명당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허준의 묘역은 풍수에서 말하는 비혈의 단계를 넘어서 비참하다는 것이 평가이다. 묘역이란 혈을 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맥은 타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치다.
기맥은 능선을 따라 흐르며 응결을 이루어 혈이 형성된다. 그러나 기맥이 약하거나 산이 퍼진 노년기 산, 지나치게 기우는 과산, 지나치게 넓은 기맥으로 이루어진 산, 능선과 계곡이 불분명한 산등은 기맥이 흩어져 혈을 결지하기 어려우며 심지어 망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준의 묘가 자리한 곳의 입수룡을 살피면 입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며 용맥이 지나치게 넓어 기맥이 흐트러져 있다. 병약한 기맥상에 자리하고 있어 혈을 결지하기 어려우며 능선과 계곡의 구분도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곳에서 풍수의 논고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난날 우리의 역사를 빛내었던 선현으로만 인식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곳을 참배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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